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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8 22:06

아리아드네의 실 4

조회 수 2027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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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지만, 동호회 이름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지 못했다. 뜨개질 동호회가 간발의 차이로, 그 이름으로 먼저 개설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여고 형은 당황해하면서 아트로포스의 실을 제안했지만, 뜻을 알아본 장섭이 재수가 없다고 반대표를 던졌다. 그래서 결국 동호회 이름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스무고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유치해도 좋을 만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스무고개실전 훈련을 기반으로 한 관찰자 양성이라는 이상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은 여고 형의 뜻이었다. 그때는 유치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동호회는 폐쇄 모임으로 이뤄졌지만,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가입했다. 등산모임으로 착각한 사오십 대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스무고개의 실전 훈련은 대략 이랬다. 로케이션 매니저 장섭이 목 좋은 장소를 구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동선이 확보되고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총무인 내가 참여 인원과 비용 등을 확인하고 공지를 올리면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때마다 달랐지만 모임마다 대여섯 명은 꼬박꼬박 모여들었다. ‘스무고개의 회원들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아 어색하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자리를 잡았다. 내가 회비를 받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집적대고 있을 때, 여고 형은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가리키며 이런 화두를 던졌다.

저 사람의 직업은 뭘까?”

 

기본 원칙은 단 두 가지였다. ‘시간은 10, 의논은 금지’. 여고 형이 스톱워치를 누르면 회원들은 일제히 그 누군가를 뚫어질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코미디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목 좋은 장소가 절실했다. 회원들은 잘 드러나지 않은 채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10분이 지나면, 회원들은 일제히 관찰을 마치고 자신 앞에 준비된 두 장의 쪽지에 관찰 결과와 두 자리 수의 숫자를 적어 잘 접은 후 여고 형에게 제출했다. 바로 그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여고 형은 경건한 표정으로 관찰 결과를 적은 쪽지는 기록으로 정리했고, 두 자리 숫자를 적은 쪽지는 종이컵에 넣어 힘차게 흔들었다. 회원들은 마치 종이컵을 뚫어버릴 것처럼 이글이글한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삼십일!”

 

31번을 적은 회원은 등에 칼을 맞은 것처럼 갑작스레 고개를 푹 떨궜다. 이 순간이 모임의 백미였다. 상반된 감정이 절대 고수의 합처럼 순식간에 교차했다. 우리는 이걸 행대’, 행동대장으로 불렀는데, 번호가 걸린 사람은 정답을 확인해야만 했다. 관찰 대상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관찰 결과를 확인해오는 것이 행동대장의 일이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가서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쭉 보고 있었는데, 당신 직업이 뭡니까?”라고 할까?

 

차라리 직업이면 그나마 나았다. 여고 형이 던지는 화두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왜 급히 걷는가?’(이동 모임에서) ‘저 사람의 고향은 어디인가?’(터미널 앞) ‘저 사람은 은행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은행 앞) 등등. 답을 확인한 이후에는 토론과 추리가 제법 흥겹게 이뤄져 나름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됐지만, 관찰 받는 대상과 상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행동대장의 부담은 점점 커졌다. 최악은 저 남녀는 무슨 사이인가?’(모텔 앞) 같은 주제였는데, 뺨을 맞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때 무던한 민영이가 없었으면 아마 주먹다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이 까다롭고도 어려운 절차에 대해 숱한 항의가 이어졌지만, 여고 형은 이를 단 한마디로 묵살했다. ‘또한 관찰자의 역량이다. 불만이 있으면 탈퇴할 것

 

불합리는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억압은 무너지는 속도를 부추기는 법. 여고 형의 독단에 점점 반기를 드는 회원들이 많아졌다. 당연하지만 탈퇴 회원도 점점 많아졌다. 묻는 척하면서 그냥 돌아와서는 거짓을 말하는 행동대장이 있는가 하면 미리 짜거나 숫자를 조작하는 일도 번번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우리의 추리는 더는 잘 맞지 않았다. 우리의 관찰은 더 이상 정보를 특정한 형태로 한정 지을 수 없었고 셜록 홈스 역시 담뱃재와 향수를 가려낼 수 없었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사라질수록 우리의 낭만도 점점 옅어져 갔다. 어쩌면 추리소설이 맞닥뜨린 운명과도 비슷했다. ‘실전 훈련을 기반으로 한 관찰자 양성 과정은 점점 쓸모없는 일이 돼갔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여고 형도 나이가 들자 생계를 걱정했다. 몇몇이 군대에 갔고 몇몇은 취직을 했고 몇몇은 애를 낳았다. 인공호흡기로 겨우 버티던 모임은 PC통신 이후 포털 사이트에 카페까지 만들어가며 수명을 연장했지만, 결국 서서히 말라버렸다. 우리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결코 붙잡지 못했다. 뜨개질 카페는 여전히 잘됐다. 역시 뭐든 기술이 있어야 한다.

 

스무고개가 왜요?”

장섭에게 답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 decca 2013.07.08 22:20
    대략.. 8 정도에서 끝날 것 같기도 합니다...
  • 하이아 2013.07.15 11:10
    더 길어도 좋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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