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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의 노처녀

by endecorb posted Aug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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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창간호에 실린 도진기님의 <구석의 노인>을 읽고 그 뒷내용을 떠올려 써 본 글입니다. <구석의 노인>을 반드시 읽고 읽어야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불연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퇴정하는 사람들 속에 의문의 할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법으로 안 되는 것도 있나? 사람을 모른다고? 그러면 사람을 잘 아는 사람에게 가보면 될 것 아닌가. 복잡한 심정에도 어디론가 저절로 발길이 향했다.

"세아씨! 세아씨! 문 열어요, ~아씨!"

떠나가라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자 문이 확 열렸고 문 뒤에 바싹 붙어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웅크린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세아씨! 집에 있으면서 왜 문을, !"

강력한 대쉬 로우킥에 무릎 뒤 쪽을 절묘하게 강타당한 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이게 쳐 돌았나, 왜 술먹고 남의 집에 와서 행패야! 다시 나타나지 말랬지!"

", 하지만..."

"뭐 세아씨? 야 니가 술먹었다고 내가 봐줄 줄 았았냐? 어디서 이게 건방지게"

마구 밟혔다.

소란이 커지자 복도형 오피스텔 양 편에서 여기저기 문이 열리고 빠꼼히 내다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휴, 내가 뭔 죄야. ! 정신 차리고 겨들어 오던지 나가던지 해라!"

아싸 이겼다. 소주 반 병을 몸에 뿌린 보람이 있었다.

현관 안에 슬며시 들어가자 세아 누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마감 밀렸는데 죽겠네. 너 거기 의자에 꼼짝 말고 올라 앉아있어. 입도 뻥끗하지 마. 숨도 쉬지 마. 커피 한 잔 타줄 테니까 그거 마시고 얼릉 집에 가세요, 알겠죠?"

여전히 이죽거리는 말투였다.

"세아씨, 아니 누,누님!"

"입도 뻥끗 말라했지! 너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했는데 술 먹고 제정신 아닌 채로 왔다고 우겨봐야 봐주는 거 없다."

", 하지만..."

"."

물이 끓는 동안 의자가 나인지 내가 의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까딱하면 저 커피포트 날아 올까봐.

"."

"?"

"니가 뭔 헛바람이 들어서 누님한테 자꾸 찝쩍대는지 모르겠는데, 난 너 남자로 1g도 여긴 적 없다고 했냐 안했냐?"

"하셨습니다."

"근데 왜 자꾸 심심하면 나타나서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번역자 일을 방해하는데? 마감 놓쳐서 나 일 끊기면 니가 먹여 살린다느니 그런 헛소리 집어 치우고. 넌 니네 아빠 빌딩이라 사무실 임대료도 없고 아빠 친구들이 던져주는 일만 하니 아주 먹고 사는게 만만하지?"

"오늘은 그게 아니라..."

"아니라?"

"제가 오늘 공판에서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그게..."

"?"

"같습니다. 재판 끝나고 나서 어떤 할머니한테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들었습니다."

"사람을 몰라? 푸하하하하!"

"왜 웃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너 내가 책 좀 읽고 테레비도 좀 보고 온라인 게임도 해보고 단체 운동도 하라고, 법률책 말고 진짜 사람들이 뭘 하고 사는지 써 있는 거 좀 보고 따라 하라고, 그렇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골백번도 더 얘기하지 않았냐? 그때는 귀에 솜막은 마냥 말도 더럽게 안 듣더니 이제 누님 말씀이 좀 와 닿더냐?"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고 21세기 자본론도 읽고 무슨 감정수업인가도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되던데요. 그리고 제 나이에 단체 운동을 어떻게 합니까. 야구도 축구도 농구도 해 본지 십수년이 넘었는데요. 케이블 티비에서 주말 예능을 보기는 했는데 누가 누군지 가요제는 또 뭔지 왜 저런 자막이 웃긴 건지 이해가 전혀 안 되더라구요."

"하아, 너보구 누가 그런 거 보래! 넌 법전 말고 아는게 없으니 이런 만화 입문서나 연예 블로그 같은 걸 봐서 기초를 쌓아야지!"

책장에서 잡히는 대로 휙휙 던져주는 책을 받아보니 <파인만>, <스피노자>, <지상최대의 철학쑈>, <굿모닝 평양> 같은 제목의 만화책들이 두서없이 날아들었다.

"... 지금 제가 만화책 보고 있을 때가 아니구요..."

"그럼?"

"처음 살인사건 변호를 맡아서 이기긴 이겼는데..."

"으음? 살인사건? 너 같은 요령부득이 형사사건을 맡아서 이기기까지 했다고?"

".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면요..."

몇 차례의 공판과 판결, 현장에서 발견한 결정적인 증거와 난데없이 나타나 내 승리를 산산조각 내버린 김옥순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꼼꼼히 떠올리며 전달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극히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나의 기억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라 자부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사진같은 기억재생 능력은 아니지만, 말이 오간 상황이나 서류의 내용은 거의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다.

"...이렇게 되서 저는 누구를 위해 무슨 재판을 한 건지, 그리고 사람을 안다는 건 무엇인지 큰 고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휴..."

"왜 그러세요?"

"이거 좀 이상하다. 이상해. 일단 니 얘기만 들어서 확인 안 되는 것들 좀 물어보자."

"."

"그럼 첫번째. 그 식당 말이야. 그거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 좀 자세히 설명해 봐."

"낡고, 뭔가 시대착오적인 분위기에..."

"이 멍청아! 그건 니 인상비평이고! 정확히 건물은 어떤 크기며 구조인지 말해 보라고!"

"...단층에 대충 열평 내외 정도 되는 면적이었고, 아주 낡아 보이는 비슷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었어요. 예전 학교 앞 술 먹으러 나가던 동네 있죠? 거기 비슷한 느낌인데 더 낡았어요. 카페나 편의점 같은 게 없고 슈퍼 세탁소 문방구 분식집 부동산 등등 오래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있었고요."

"문은 나무야 시스템 창호야?"

"시스템 창호요?"

"격자 유리 미닫이문이라면서. 그게 나무야, 아니면 흰 PVC나 알루미늄이었냐?"

"나무 문 이었어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데요?"

"있다가. 범인 아줌마는 가족이 여동생 한명 뿐 인거야?"

"? 어떻게 아셨죠?"

"니가 계속 가족들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했잖아. 무죄 받았을 때도 동생이 환호성 질렀다는 얘기만 했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래서 니가 요령부득이라는 거야. 누나가 생각난 거는 있다가 얘기해 줄 테니 우선 묻는 거에나 제대로 대답해봐."

"대답 잘하면 뭐가 달라지는 건가요? 뭔가 느낌이 있는 거죠?"

"시끄러. 넌 상식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게 탈이야. 누나 말 좀 똑바로 듣고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

"너 핸드폰 가진 거 꺼내봐. , 국정원이 도청 안했다는 폰이네. 뭘 좀 아는구나. 브라우저 열고 네이버 검색창에 여성 탈모라고 쳐봐. 아니, 검색 누르지 말고. 밑에 연관 검색어 보이지? 뭐 나오냐?"

"여성 탈모 치료, 여성 탈모 원인, 20대 여성탈모...."

"스톱! 너 연관 검색어는 실제로 검색 많이 한 내용들이 뜨는 거라는 건 아냐? 아까 뭐라구? 정수리에 머리가 없는게 남편이 잡아 뜯은 거고 50대에는 그렇게 머리가 안 빠진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그 이상한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20대 여성 탈모 검색해서 첫번째 블로그 글 봐봐. , 그거."

"! 20대 여성인데 이유 없이 정수리 탈모가 와서 고민이라는데요?"

"그렇지? 요새 하도 살기 팍팍해서 젊은 사람들도 다들 머리가 팍팍 빠져. 요즘 여자들 중에 탈모방지 기능성 린스 하나 정도 없는 사람 없을 것이다. 나 빼고"

"..."

"상식없는 이상한 할머니 얘기 하나 더 할까? 그 불쌍한 아줌마 사건 전날 일할 때는 CCTV에 반지가 안 찍혔고 당일 날 밤에는 반지가 찍혔다고 했지? 그래서 그날 밤에 남편한테서 몇십 년 만에 반지를 받은 거라고. 그걸 근거로 남편은 아줌마 머리 뽑구 코가 삐뚤어지도록 두들겨 패던 사람이라 했겠다?"

"분명 그런 얘기였죠."

"게다가 밤에 찍힌 건데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했다고 했지?"

"그랬죠. 그게 왜 이상한 건가요?"

"그건 말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은 반지를 끼고 일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이유 때문이야. 손가락에 반지끼고 물에 담그는 일 종일하면 습진 같은 거 생기고 설거지할 때 걸리적 거리고 해서 빼놓고 하는게 상식이지. 집에서 고작 하루에 몇번 설거지하는 거랑은 다른 거야. 하루 종일 물에 손 담그고 있는 거랑 비슷하거든. 그래서 일할 때 화면에는 반지가 없고 문 닫고 집에 갈 때는 끼고 있는 거지."

"저 자주 가는 식당 아주머니는 금반지 계속 끼고 계시던데요?"

"그런 실반지 같은 건 귀찮으니 그냥 끼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야밤에 불빛도 약한데 반짝거리는 게 화면에 잡힐 정도면 매일 끼고 물에 담가서 광택 같은 게 생길 리 없는 금반지 같은 게 아니야. 위에 빛을 굴절시킬 정도의 투명도를 가진 무언가가 큰 게 달린 형태의 반지인거지. 그런 거라면 더더욱 일할 때 끼지 않아."

"아줌마가 그날 저녁에 남편에게서 반지를 받은 게 아닌 거군요."

"그렇지. 아마 그 반지 결혼기념일인지 생일인지 몰라도 남편이 한참 전에 마음먹고 사준 물건 일거야. 매일 집에 갈 때 끼고 다닐 정도로 아줌마가 맘에 들어한 걸 보면 젊을 때 왕창 무리해서 산 결혼반지일 수도 있어. 재판 과정에서 손을 계속 쓰다듬는 행동을 했다는 걸 보면 반지 쓰다듬는 버릇이 있었다는 얘기잖아. 버릇이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지. 나보고 걸라면 결혼반지 쪽에 걸련다."

"그럼 아줌마가 돌아가신 아저씨한테 맞고 살았다는 건..."

"그냥 완벽한 헛발질. 머리가 빠진 것도 반지가 없는 것도 아무런 증거가 안 된다는 건 지금 보여줬지? 코가 삐뚤어졌다고? 그 정도로 맞고 살았으면 그거 외에도 외상이나 본인 증언이 있어야 말이 되는 거지."

"코는 왜 삐뚤어진 건가요?"

"너 가서 거울 좀 봐라, 인간 얼굴은 정확히 좌우대칭이 아니야. 너 그 할머니한테 얘기 듣기 전까지는 아줌마 코가 삐뚤어진 걸 눈치 채지도 못했잖아. 그건 맞아서 코가 돌아간 게 아니야. 허재 코 못 봤어? 그런 게 맞아서 돌아간 코잖아. 보통 사람들은 코도 약간 삐뚤어져 있고 양쪽 눈도 살짝 크기가 달라. 그게 비슷할 수록 예뻐 보이고. 원빈 김태희 얼굴이 정확히 좌우대칭이라는 짤도 돌아다니는데, 본 적 없지? 심지어 연예인들은 자기 얼굴에서 맘에 드는 한 쪽만 보여주기도 하잖아. 제시카 왼쪽얼굴 몰라?"

"... 그게 누군가요?"

"... 암튼 맞고 산 건 아니야."

"확실히 아줌마는 맞고 살았다느니 그런 말은 없었어요. 사건 조서나 진술과정에도 그런 얘기는 없었죠. 있었다면 검찰 측에서 재판 중에 지나가는 말이라도 언급했을 텐데 전혀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맞고 살았다면 아마 하나 밖에 없는 동생 분이 사건을 맡기면서 한마디라도 하지 않았겠냐? 남편 잘못 만나 평생 뚜드려 맞고 고생만 하던 우리 언니 불쌍해서 어쩌냐 하면서. 너 그런 얘기는 전혀 안하던데."

", 확실히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그냥 우리 언니가 스토커한테 시달리다가 형부가 당하고 무서운 나머지 자기 몸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라 했죠."

"그 스토킹 얘기는 어디서 나온 거지? 본인 증언은 아닌 거 같던데."

"본인은 재판 과정에서 한마디도 안했죠. 접견할 때 고개 숙이고 계속 울면서 법에 맡기겠다 몇 마디 웅얼웅얼 하는 정도였어요."

"그럼 동생분이 얘기해 준 건 언제지?"

"기소되고 첫 공판할 때는 국선이 변호했으니 정확히는 첫 공판 뒤 저한테 와서 의뢰할 때 들은 거죠. 검찰 측에서 기소하고 난 다음에야 검찰이 언니를 살인으로 몰고 가는 줄 알았을 테니까요. 듣기엔 처음에 경찰에서도 살인으로 기소의견 올린 건 아니라고 하던데요. 누가 봐도 정당방위로 불기소 갈 만 했으니까요."

"검찰에서 살인으로 기소하고 난 다음에 너를 구해서 변호를 맡겼다 이거네?"

"그렇죠."

"흐음..."

"... 이 갑작스런 침묵은 뭔가요?"

"가만 저쪽에 좀 가 있어봐. 생각 좀 하게."

"......"

생각에 빠져 아까 내 자세처럼 의자와 일체화 한 누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정신을 좀 가다듬고 방을 휘 둘러보니 두어달 사이에 책이 또 증식한 모양이다. 책장에 빈틈없이 가득차고 모자라 이중 삼중으로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 더미가 자라나 있다. 가끔 내가 들러 보지 않으면 노냥 이상태다. 일어난 김에 주섬주섬 정리해 꼽고 설거지도 하고 방바닥도 쓸고 닦는 동안에도 누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거실 소파에 잠깐 기대 앉아 오늘 재판을 곰곰이 반추하려 했는데...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 ! 일어나! 정신 좀 차려!"

"으으으... , !"

"이 누님께서 네놈이 망쳐놓은 사건 좀 생각해보니 정리되는 것도 있고 아니다 싶은 것도 있어서 얘기를 해줄 터이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니가 알아서 해라."

". 알겠습니다."

"지금 하는 얘기가 반드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 이상한 할머니 보다는 세상의 상식에 입각해서 생각해 본거니 도움이 될 거야. 이름 하여 개연성 추론이라고나 할까."

"... 답지 않게 진지하신데..."

"쫑알대지 말고! 니 얘기를 듣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 사건 얘기엔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어.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말 할 테니 들으면서 이상한 게 있으면 얘기해. 알겠지?"

"."

"일단은 CCTV.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식당에 왜 그런 게 필요한 거지? 진열품 도난 방지도 아니고 종업원 감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간방범 용도도 아니야. 밤새 식당에 훔쳐갈 만한 물건이 뭐가 있겠어? 이빠진 뚝배기? 드럼통 테이블? 전날 담가놓은 깍두기? 금고가 있어서 거기에 현금다발을 보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 내가 규모가 어떤 건물인지 물어본 이유가 그거야. 혹시 요새 지은 빌딩 1층에 세 들어 있어서 원래부터 빌딩 시큐어리티 시스템이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사다 달았다는 얘긴데, 누가 무엇을 위해서 단 것인지 아무도 알아보지 않은 거 맞지?"

"그렇긴 한데요,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왜 냐니, 두 건의 범죄 장면이 명확하게 기록되었으니 중요하지. 더 이상한 건 단 하나의 CCTV, 그것도 실내에 설치한 점이야."

"?"

"요새 나오는 CCTV는 보통 4개 한 세트로 해서 모니터 하나를 4분할해서 보여주는 방식이거든. 그래서 해상도가 높지 않아. 가정용은 화소수가 1280X960 정도 나오면 잘 나오는 거지. 그 정도면 핸드폰 화면에서 간신히 뭉개지지 않고 보이는 정도 라구. 요새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경찰들이 마티즈 CCTV 번호판 색 달리 보이는 거 분석한다고 재연을 했니 어쩌니 하는 거 안봤.. 니가 봤을 리가 없지. 아무튼 엔간한 CCTV로는 화질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없다 그 말이야. 공판 때 공공기관에 있는 낡아빠진 빔 프로젝터로 쏴서 보는데 사람 얼굴이 식별되고 손가락에 반지가 보일 정도면 애초에 HD급 고해상도 기기를 일부러 선택해서 달았다는 거거든. 게다가 설치 위치도 이상해. 보통은 출입구 밖에 드나드는 사람을 볼 수 있게 달고, 가게 같으면 계산대를 볼 수 있도록 달아. 아까 니 설명대로면 밖에서 문 따고 들어와도 볼 수 없고 안에 들어와서도 불 키지 않는 한 출입구도 안보이고 계산대도 안 보이는 곳에 달려 있는 거니까, 도대체 설치 목적을 알 수 없는 물건이란 말이야."

아니, 지나가는 잡범들 겁줄 목적으로 식당 안에 잘 보이게 달아 놓은 거 아닐까요?”

멍청아, 그런 용도면 문 밖에 캡스 표시 붙이고 CCTV 껍데기 구해다 달아놓으면 되는 거 에요. 비싼 기계를 이상한 위치에 달 이유가 없어. 그리고 그 돈이면 출입문 튼튼한 걸로 바꾸고 자물쇠 대신에 키패드 달아도 남아.”

, 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아까 나무문은 왜 물어보신 건가요?”

, 그건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였는데, 니 얘기를 듣고 나서 하나는 확실해 졌지.”

그게 뭔데요?"

판사고 검사고 변호사고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다 리신 눈에 문도 뇌라는 거지. 증거를 디밀어 줘도 절대 두 번 생각하면서 보질 않아."

? 무슨 눈에 무슨 뇌요?"

이번 사건은 말이야, 밀실살인이야."

네에에에?"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얘기죠? 분명히 CCTV 앞에서 스토커가 남편을 살해하고 아줌마가 그놈을 찔렀는데 무슨 밀실이 나와요?"

스토커가 국밥집에 어떻게 들어왔다고? 몰래 들어와? 무슨 투명인간이라서 눈에 안보이게 들어온 건가, 아니면 벽을 뚫는 능력이 있어서 벽으로 들어온 건가? CCTV에 들어온 순간이 찍혔으면 검사가 몰래 들어와숨어 있었다고 할 리가 없잖아. 아까 니 입으로 말했지. 예전 학교 앞 술집 동네같이 다닥다닥 벽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측벽에 창도 없다는 얘기. 남은 건 배면 쪽에 문이나 창이 있어서 그리로 침입했을 가능성인데, 그랬으면 그리 침입했을 것 같다고 분명히 얘기를 했겠지. 이제 왜 밀실인지 알겠어?"

아뇨, 아직."

너 그 집은 덧문에 자물쇠를 채운다고 하지 않았냐? 안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살인범이 있는데 하나 밖에 없는 출입문에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으니 이게 밀실 아니면 뭐니?"

!"

특이하다면 이 밀실에는 시체가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살인범이 갇혀 있었다는 점이지. 밀실살인 장치라고나 할까."

“... , 그게 나무문 하고는 무슨 상관이...”

흰색 PVC 격자 미닫이문은 요새 통칭 미국식 시스템 도어라고 불리는 물건인데, 이건 시건장치가 달려 있어서 굳이 덧문을 닫지 않아도 잠그고 다닐 수 있는 문이야. 가격도 꽤 나가지. 아파트 단지 1층에 방범창살 안 달고 이런 시스템으로 발코니하고 창문 고쳐 놓은 집들 본 적 있을 걸. 이런 문은 안에서 당연히 잠글 수 있어. 알미늄 문도 마찬가지야. 제법 튼튼한 도어 락을 달아도 된다고. 하지만 나무 미닫이문은 다르지. 밖에 대충 철제 고리 하나로 걸어놓는 정도로는 문이 방범 상 완전히 잠긴 거라 볼 수 없잖아. 문짝 위로 힘줘서 들어내면 문이 아예 빠져버리는데 뭘. 그래서 나무 미닫이문이 달린 예전 건물들은 다 양철 판으로 된 덧문에 자물쇠를 달아서 문을 잠그지. 너도 현장 갔을 때 동생 분한테 받은 열쇠로 덧문 열고 들어갔다면서.”

그러면 누군가가 스토커가 안에 들어간 다음에 밖에서 문을 잠근 거라고 봐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투명인간이나 액체인간이라는 설명도 가능하긴 하지.”

“...”

문 얘기를 더 해볼까? 니가 정당방위의 증거라고 당당히 내밀었던 안 열리는 출입문에 대해서?”

그건 확실한 부분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처음 본 동영상과 니가 틀어줬다던 동영상에 대한 얘기에서는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어. 문 관련해서 잘 떠올려 봐.”

처음 영상에서는... 부엌 쪽에만 불빛이 있고, 출입문 쪽은 어두웠죠. 그러다가 문이 열리면서 남편이 들어왔고... 사건이 일어났고... 다음에 출입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아줌마가 들어....!"

이제 눈치 챘냐?"

처음 영상에서는 출입문이 뻑뻑하지 않아요!"

그래. 똑같은 문인데 첫 영상에서는 왜 발로 툭툭 치면서 2,3초간 상당히 힘들여 여는 장면이 안 나오는 건지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뭘 본거야? 처음 본 거는 고새 다 까먹고 두 번째 본 것만 증거가 되다니. 이래서 내가 우리나라 사법제도를 믿지 않아요.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 관심이."

아니,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죠? 사건 이후에 계속 잠겨있던 가게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되는 거야.”

?”

나무 미닫이문. 낡은 단층건물. 오래된 국밥집. 오랫동안 사람이 안 드나들었음. 이게 다 더해져서 나온 결과야."

자세히 좀 설명 해주세요."

너같이 있는 집 아드님께는 오래된 국밥집이 서비스도 맛도 위생도 엉망인 곧 망할 집으로만 보이겠지만, 실은 그런 오래된 집이야 말로 어떤 의미론 서비스도 맛도 위생도 최고라는 증거야. 요새 최고학벌 최고직장 다니던 날고 기는 양반들도 함부로 차렸다간 수수대처럼 우수수 넘어져 나가는 게 요식업계라고. 부부가 기십년을 망하지 않고 운영했다는 건 그만큼 뭔가 있는 집이라는 거지. 그런 집이 문이 잘 안 열린다고 사시사철 열어놓고 영업을 했다는 추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랬다가는 손님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전날 동영상에서 문이 잘 안 열렸다, 그러니 다음날도 그랬을 것이다 라는 건 낡은 가게라고 영업하는 곳이 게을러 빠졌을 것이라 짐작하는 선입견에 의한 것이지. 아마도 그날 저녁에 당장 문틀에 초칠을 했을 거야."

초칠이요?"

너같이 있는 집 어린 애들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목조로 지은 도시형 한옥이라 불리는 집들은 창하고 문들이 다 나무문틀로 되어 있었어. 그런 집들은 목구조로 지어져 있어서 시간이 흐르면 나무에 변이가 생겨서 조금씩 뒤틀리게 되. 그러면 문틀도 같이 뒤틀려서 미닫이문이 끼어서 잘 안 움직여요. 이때 양초를 가져다가 문틀에 문질러서 매끌매끌하게 해놓으면 또 얼마간은 문이 잘 여닫히게 되는 거야.”

, 그럼 전날 안 열리던 문틀에 초칠을 했기 때문에 사건 당일에는 문이 잘 여닫혔다는 거군요. 그러면 제가 갔을 때는 왜 안 열렸던 건가요?”

그거야 관리를 안하고 닫아놨으니까 그런 거지. 워낙에 낡은 집이라 아마도 절기 당 한 두어번은 초칠을 해줘야 했겠지. 사람이 손을 안보면 건물도 금방 티를 내거든."

그렇다면, 제가 정당방위의 증거로 든 건 아무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단 말인가요..."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 멍청이들을 낚아서 무죄로 만들어 주는데 조금은 도움을 줬잖아. 뭐 그 이전에 오상방위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아줌마를 구치소로 몰았으니 쌤쌤 이려나."

?”

아까 니가 얘기했었잖아. 경찰도 불기소 의견이었다고. 이건 누가 봐도 정당방위라 생각할만한 상황이야. 눈 앞에서 남편을 목 졸라 죽인 범인이 손을 치켜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안 죽을라면 뭐라도 던지거나 휘두르려 하는 게 당연하지. 기소건수 하나 불리려는 검찰 농간에 아줌마만 괜시리 고생한 건데, 아마 니가 담당검사랑 말싸움을 안 벌였거나 공판 속행 얘기 꺼내지 않았다면 그날로 무죄판결 나왔을 걸.”

“...”

너무 충격 받지 마. 니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상이 좀 드러나는 거잖아. 그날 판결났으면 지금쯤 큰 사단이 났을 거야.”

? 또 무슨 사단이 난다는 말씀인가요?”

그야 또 사람이 죽어 나갔을 거란 얘기지.”

이번에야 말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까! 왜 얘기가 그렇게 되요?"

워워, 진정하고. 여기 앉아서 물 좀 마셔.”

아니, 지금 진정이 되나요? 또 누가 죽는다는데?”

누가 지금 당장이라 했어? 이거 마시고 좀 앉아. 그래야 얘기를 듣지. . 좋아. 이제 들을 준비 되었어?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그래. 그냥 시간 순서대로 얘기를 해보자. , 여기 금술 좋게 오랫동안 국밥집을 해온 부부가 있어. 자식도 없고, 그저 매일 국밥 끓여서 팔고 집에 가서 테레비나 보고 쉬다가 새벽이면 약수터 산책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고 했겠지. 소소하게 알콩달콩 서로 의지하며 살았어. 그런데 조용하던 동네에 조금씩 재개발 열풍이 불어 닥친 거야.”

그걸 어떻게 아셨죠?”

인근 공사장 인부들이 드나들었다면서. 너 공사장 함바집이 얼마나 황금동아줄인 줄 알아? 아파트단지 같이 큰 현장이 생기면 거기서만 밥을 먹어야 해요. 식대가 식권으로 나온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비리도 생기고 그랬어. , 판례 봤어? 그럼 잘 알아 듣겠네. 그런 현장이 아닌데 인근 공사장 인부들이 드나들면서 밥을 먹었다는 건 단층짜리 집들이 있던 동네에 연립이나 다세대, 아니면 두어동 짜리 아파트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는 얘긴 거지. 니 얘기대로면 부부네 국밥집 부근은 아직 재개발 되지 않았지만 같은 블럭 맞은편이나 그 옆 블럭 정도는 공사장이 여러 개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어. 보통은 사람이 매일 같은 밥 먹지 않으니까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국밥을 먹는다 쳐도 대충 서너개 이상의 현장이 인근에 있다고 봐야지.”

저도 차타고 지나가면서 근처에 공사장이 몇군데 있는 걸 봤어요.”

그렇지. 해서 부부 국밥집에도 얘기가 들어 왔을 거야. 재개발 할 테니 땅 파시라고. 하지만 부부는 다른 자리로 갈 의향이 없었어. 그 나이에 어딜 가서 새 장사를 시작할까. 일이년 동안 잡아놓은 장사 터가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요사이는 인부들 때문에 국밥도 잘 나가는 중인데 뭐가 아쉽겠어. 그 때문에 몸이 달았던 사람들이 생겨났지.”

누군가요?”

뻔하잖아. 재개발로 크게 한 몫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지. 올해부터 도로사선 제한 없어진 거 알아? 예전에는 도로를 가리지 않도록 도로변에 있는 건물의 높이를 제한했는데, 훌륭하신 대통령님께서 규제완화 하신다고 그거 없애버렸다고. 여튼 지금 정부는 뭐 맘에 안 들면 아예 없애는 게 특기라니까. 해서 전에는 개발해도 투자금 조차 건지기 힘들었던 땅들이 다 노른자위로 탈바꿈하고 있어. 너 지금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고 있지? 내가 그렇게 보라고 했는데 경제신문 안보지? 매경 경제면만 매일매일 보라니까 말을 안 들어. 여하튼 그런 게 있어. 전에는 개발하기 힘들던 땅들이 개발하기 쉬워졌다, 그냥 그렇게 알면 되는 거야."

, 가게를 접고 보상금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는데 안 해서 주변에 적이 생겼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그건 일단 거기까지 하고 사건 당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스토커가 등장하지. 이 사람,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람을 목 졸라 죽이는 사람이야. 인성에 엄청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게 뻔히 보이잖아. 그런데 남편하고는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있다는 정황이나 증언이 없단 말이지. 그리고 전과가 있다거나 하지도 않고 사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거나 하는 수사 내용이 나온 것도 아닌 거 같고. 해서 고작 찾은 게 부인과의 통화내역이고, 부인 전화로 자신의 집 근처 공중전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걸로 스토커라 추정한 거란 말이지. 심지어 전화를 걸었다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서 CCTV에 찍힌 적이 있다는 거고.”

그렇죠. 그게 검찰 측 증거였죠.”

어차피 물적 증거는 없는 부분이니 나도 검찰처럼 추론에 의존해서 얘기를 할께.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스토킹이 어색해보인단 말이야. 남편을 죽일 정도로 부인을 따라다닌 스토커면 가게 앞에서 행패를 부렸다던가, 남편하고 시비를 붙었다던가, 주변 사람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다녔다던가 할 법 한데 그런 얘기가 전혀 없다는 게 말이야. 그리고 스토킹 피해자인 아줌마가 스토커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거, 그것도 스토킹 추론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야. 그냥 전화기록만이 스토킹의 증거라는데, 고작 그런 정도 증거에서 시작해서 국밥집에 투명인간처럼 숨어들어서 남편을 죽이고 아줌마를 차지하려 했다는 결론에 다다른 건 너무 비약이 심하지. 그거에 비하면 싫다는 여자 집에 맨날 전화하고 술 먹고 오는 너는 스토커 대마왕 이겠다. 내가 남편이 없어서 다행인가. 아무튼 그렇다고 스토커가 아줌마 애인이었다는 이상한 할머니의 추론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봐. 그거야 말로 공중전화 기록만큼의 증거도 없는 그낭 이야기잖아. 니가 그런 얘기에 홀딱 넘어간 게 멍청한 거지. 여성탈모와 반지 얘기에 홀려서 가정폭력 피해자와 구출자라는 낭만적인 스토리에 빠져든 거잖아. 이건 딴 얘기지만 지금 아줌마 상태는 절대 정상이 아니야. 내가 들은 걸로만 봐도 전형적인 PTSD 상태인데, 심리치료는 받고 있는 거야?”

“...스토커 대마왕..."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집중, 집중! 그러면 스토커가 스토커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라면 과연 이 스토커는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고, 무슨 이유로 국밥집에 들어왔으며, 왜 남편을 살해했고, 공중전화는 뭔지 생각해 보자고. 이젠 스토커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으니 범인씨라 하자구. 범인씨가 직접적으로 한 행동이 정확히 뭐뭐야?”

국밥집에 야채배달을 했다. 아줌마 핸드폰으로 몇차례 전화를 했다. 공중전화 근처에서 CCTV에 찍힌 적이 있다. 사건 당일날 밤 국밥집 안에서 부엌에 불을 켜고 숨어있었다. 국밥집에 들어온 남편을 목졸라 살해했다. 이후 아줌마한테 손들고 다가서다 칼에 찔려 사망했다.”

핸드폰으로 전화한 거야 배달 관련으로 한 거라 볼 수 있는 거니까 일단 재껴 놓고, 투명인간이나 액체인간설도 빼. 그럼 공중전화 근처 문제인데, 근처에 있었다는 점만으로는 본인이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하고 지나가자고. 그럼 남은 건 그날 밤에 있었던 진짜 상황인데, 범인씨는 누군가 식당 자물쇠를 열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국밥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 부엌에서 불을 켜고 무언가 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동안 누군가가 식당 덧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는 게 남는 거야. 그리고 제일 중요한 CCTV에 찍힌 동영상이 있지.”

“CCTV에 범행일체가 찍힌 게 왜 제일 중요한 건데요?"

그거야 말로 범인씨 내연남 설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증거거든. 아줌마가 남편 죽여 달라고 범인씨를 보내놓고 그걸 CCTV로 촬영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로써 이상한 할머니가 너한테 불어넣은 로맨스설은 완전히 논파!"

휴우, 그럼 저 사람을 몰라서 이상한 판결을 내리도록 한 거는 아닌 거네요."

사람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상식이 없어 너는.”

“...”

아무튼 또 하나. 범인씨가 이 동네에 야채배달하며 나타난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 아줌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횟수는 고작 몇 번이라면서. 그정도 가지고 스토커라는 추리는 우습지만 알고 지낸지 아주 오래된 사이는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증거는 되지. 내 느낌으로는 그 시점이 동네에 재개발이 시작된 시점이 아닐까 싶어.”

그건 또 왜요?"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범인씨의 정체는 재개발 추진 측에서 심어놓은 용역회사 직원이나 조직폭력배가 아닐까? 신분도 가짜일 거 같고. 우리나라에 가짜 주민증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다며. 살인범으로 체포라도 됐으면 몰라도 이미 죽었는데 우리나라 경찰이 가족도 없는 사람 신분이 가짜인지 여부를 열심히 수사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 그냥 맞겠거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겠지. 이상한 곳 출신이 아니고서야 평범한 야채배달 아저씨가 별다른 원한 관계도 없는 사람을 태연히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리 없지."

그럴 듯 하네요.”

그게 맞다면 부엌에서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우리나라 재개발 지역에서 항상 일어나는 사고가 뭐지? 구룡마을 같은 곳에서 잘 나는 거 있잖아."

의문의 화재사고?"

그렇지. 그건 어째 아네. 또 무슨 판례야? 아무튼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 집에는 유독 의문의 화재사고가 잘 나서 개발사업의 걸림돌이 없어지잖아. 난 범인씨는 그런 공작을 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었을까 싶어. 사건 당일 밤,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의문의 A씨가 나타나서 문을 열어주곤 자기가 밖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도록 덧문 닫아놓고 망을 볼 테니 범인씨에게 부엌에 들어가서 공작을 하라고 얘기한 거야. 그 얘길 듣고 범인씨는 식당으로 쓱 들어 간거지. 뭔가 조작을 하려고 불을 켰고, 그 때부터 CCTV에 찍히기 시작한 거지. 그동안 A씨는 덧문에 자물쇠를 채워버린 거야."

“CCTV에는 왜 찍히게 하고 자물쇠는 또 왜 채운건가요?"

이제 CCTV의 괴상한 위치와 엄청난 해상도가 설명될 수 있어. 처음부터 범인씨가 공작을 하고 나가는 광경을 찍어놓기 위한 거였던 거지. 그리고 의문의 A씨는 국밥집에 원하는 위치에 CCTV를 달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인거고. 아마도 동네에 공사가 많아져 가게에 모르는 사람들 오가니 안전을 위해 달아주겠다 했겠지. 그럼 왜 동영상 증거를 확보하려 했을까. 범인씨가 통제불능이 된 거지. 아마도 식당주인 부부에게 알리겠다며 자기를 불러온 사람들을 협박해서 돈을 더 받으려 했거나 폭력성향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지 않았을까? A씨는 일석이조의 유혹에 넘어간 거야. 그 열었던 자물쇠 다시 채워놔서 불을 낸 범인씨를 가둬 놓으면 연기에 질식하거나 가스폭발로 저 세상으로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CCTV엔 범인씨만 찍혀있을 테고. 이제 A씨가 누구인지 감이 오시는지?”

"그 전에요, CCTV가 불에 타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증거자료가 없잖아요?"

"최신형은요, 와이파이로 연결해 놓으면 클라우드 서버에 바로 데이터를 전송한답니다. 그거 찍힌 거 없애겠다고 본체 하드 뜯어가고 이런 거는 이미 옛날 얘기에요. 아시겠습니까? 말 돌리지 말고. 그러면 A씨는 누구?"

“...혹시 동생분인가요? 가족이라면 식당 열쇠에 접근하기 쉬울 테니까요. 아예 언니가 예비열쇠를 줬을지도 모르고요.”

딩동댕!"

"그렇게 보자니 좀 이상한데요. 그 동생분이 CCTV나 와이파이, 클라우드 서버가 뭔지 알 것 같지 않은데요."

"더 들어봐. 정확히 어찌된 사연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언니 부부와 식당 재개발을 놓고 분명히 돈 문제가 얽혀 있을 거라 생각해. 식당 차릴 때 창업자금을 보탰거나, 혹은 그 땅이 원래 자매 부모님 집 자리라서 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어려울 때 언니한테 돈을 빌려줬을 수도 있지.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이 기회에 식당 청산하고 돈을 받고 싶었던 동생 생각은 부부 의견과는 전혀 달랐을 거야. 다툼도 있었을 테고, 주변에서 그 얘기를 들은 의문의 인물X가 동생에게 접근해 온거지."

"그건 또 누구에요?"

"재개발로 이득을 볼 땅주인이나 투자자 중에 한 명 또는 집단. 몇 명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이 흑막의 인물X가 뒤에서 사건을 기획한 사람이야. 동생도 별다른 성공 없이 살아온 사람인데 무슨 CCTV 설치하고 범인씨 끌어오고 할 지적능력과 금전적 여유가 있을 턱이 없지. 처음에 동생은 범죄를 저질러야 겠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을 거야. 그저 보상금이나 나눠 받으면 그걸로 편히 노후를 보내야 겠다 정도 생각으로 X의 꼬임에 넘어간 거지. X는 범인씨가 위험요소라고 인지한 시점부터 그를 제거하기 위한 덫을 깔기 시작했지. 아마 CCTV 설치시점 즈음해서부터 공중전화에 가서 언니 핸드폰으로 전화 걸어서 좀 들고 있다가 끊기를 반복하라고 시켰을 거야. 불 낸 다음 범인씨가 통제불능이 되면 경찰에 CCTV 데이터를 내밀고, 수사과정에서 범인씨가 아줌마네 가게에 무슨 앙심이 있었다는 보강증거로 찾아내게 하려고 말이야."

"동생이 없이 살아왔다는 얘기는 한 적 없는데요?"

"너 승소하면 성공보수액 얼마 받기로 했는데?"

"... , ."

"살인 같은 중범죄 혐의를 받았는데 형사사건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너 같은 초짜한테 찾아온 것부터가 이상하지. 돈과 상식이 조금만 있어도 판검사 관둔지 얼마 안 된 사람 찾아가야 전관예우 받을 수 있다는 건 장삼이사들도 다 아는 이야기야. 관련해서 또 의외로 사건의 조망을 제공해주는 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 하필 왜 니가 이 사건을 수임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

"...제가 일을 잘 해서라는 얘기는 결코 아닌 것 같다는 감이 옵니다."

", 딴 건 몰라도 니 감만은 점점 나아지고 있어. 이제 계속 사건을 정리해 보자구. X의 계획은 식당건물에 불을 질러서 장사를 더 이상 못하도록 해서 부부를 낙담시킨 다음, 동생을 통해 언니네는 이제 가게도 없고 장사밑천도 없으니 보상금 주는 대로 받고 나가는 게 남는 거다 이리 꼬드기도록 해서 재개발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거였을 거야. 그런데 범인씨가 중간에서 어깃장을 놓으면서 이 단순한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보험 삼아 CCTV를 설치해 범인씨가 불장난 하는 과정을 찍어 뒀다가 여차하면 역으로 써먹을 생각이었겠지. 한데 동생이 순간적인 발상으로 자물쇠를 채웠고, 하필 운명의 장난인지 뭘 놓고 갔는지 몰라도, 음 아마 핸드폰, 아니 그러면 같이 안 왔겠지. 둘이 같이 온 것을 보면 집 열쇠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주인부부가 가게로 오게 된 거야. 여기까지는 분명한 거 같지?"

"."

"그러면 범인씨는 식당 부엌 안에서 뭘하고 있었을지 떠올려 보자구. 아마도 식당에 있는 재료들을 동원해서 뭔가 즉석 발화장치 같은 걸 가스관 주변에다 만들 궁리를 하고 있었겠지. 나중에 방화여부 조사해도 티나지 않도록. 그러다 식당 입구로 나가서 동생을 불렀어. 불을 켜도 그다지 밝지 않았으니 후레쉬 같은 걸 달라고 했을 수도 있고, 기름이나 뭔가 불에 잘 탈만한 게 있는지 물어보려 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답이 없는 거야. 이상하다 싶어 문을 열어보니 안 열려. 그때 동생이 자길 가두려 했다는 걸 깨달았겠지."

"그건 무슨 근거로 나온 얘기인가요? 범인씨가 밖으로 나오려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도마랑 식칼. 아줌마가 범인씨한테 휘두른 거 말이야. 영업 끝난 국밥집 입구 테이블에 왜 고기 썰던 도마랑 식칼이 있어? 그야 누가 거기 놨으니까 그런 거지. , 이거 봐라, 비리비리한 게 겁도 없이 나한테 장난질을 치려고 해. 나가면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겠다 생각 했겠지. 덧문에 달린 자물쇠라 봐야 어차피 양철 문에 나사나 용접으로 고정된 거잖아. 도마같이 무거운 물건으로 내부 고정부위를 몇 번 내리치면 쉽게 부실 수 있어. 사실 이 밀실은 동생이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이라 범인씨의 완력이면 금방 깨고 나올 수 있는 허술한 상태였던 거야. 여기서 칼을 들고 나온 것도 범인씨가 조폭이나 용역출신 일거란 추측을 뒷바침 해주지. 공작을 마치면 바로 문을 부수고 나갈 수 있도록 입구 테이블 위에 도마와 칼을 두고 다시 부엌으로 가서 뒤적뒤적 하고 있었겠지."

누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부부가 등장할 차례지. 아저씨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문 열어 놓고 들어가면 벌레 같은 게 들어올 수 있으니 다시 문을 닫아. 안쪽으로 들어가자 부엌에 있던 범인씨가 보였겠지. 불빛은 그쪽만 보였으니까. 서로 눈이 마주쳐. 순간 범인씨는 들켰으니 에라 모르겠다 죽여 버리고 튀자 라고 생각했겠지. 불을 내서 가게 없애나 주인을 아예 보내버리나 같은 해결책이니 문제없다, 강도라 생각하겠지,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는 범행을 저질러."

무서운 광경을 떠올렸는지 잠시 몸서리를 친다. 어깨를 감싸 안아 주려다 명치를 쎄게 맞았다. 아프다.

"아줌마는 남편이 안 나오니 같이 찾아야 하나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와. 문을 닫고 돌아서서 그 광경을 본 거지. 범인씨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다가와. 다들 동영상보면서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나 몰라. 내가 너 목을 졸라 죽이겠다, 그러고 두 손을 쳐들고 다가온다고? 무슨 좀비야 강시야 그게. 칼을 잡으려고 달려온 거지. 아줌마는 범인씨가 손 내밀고 뛰어오는 방향을 보고 그쪽에 있는 뭔가를 있다 싶으니 잡히는 대로 집어 들어 휘둘렀을 뿐이야. 무슨 있는 힘을 다해 칼을 깊숙히 찌르기를 했다는 건지. 아줌마가 무림고수야? 그저 엉겹 결에 범인씨가 뛰어드는 방향으로 칼날이 향한 거야."

누나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문 잠그고 나서 잠시 피해있던 동생은 불이 났나 확인 차 돌아왔다가 식당입구를 보고 기절초풍했어. 불기운은 없고 잠가 두었던 문이 열려 있었으니. 아마 슬쩍 다가가 보곤 더더욱 혼비백산 했겠지. 피냄새가 풍기는 식당 바닥에 범인씨가 뒹굴고 있고, 언니는 형부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하고 있었으니. 다급히 몸을 피하고는 X에게 연락했을 거야. 자기가 벌인 일을 이실직고 했을 리 만무하고, 당신이 살인자를 보내서 우리 집안에 난리 났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알아서 해라 이랬겠지. X는 예상과 다른 전개에 놀랐겠지만 곧 자기들과 연결되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떠올려. 그리고 자꾸 아무 일도 안했다는 얘기에 동생이 뭔가 저질렀구나 감을 잡지. , 진정하고 일단 집에 가서 생각 좀 해봐요. 이상하게 꼬였지만 어찌되었든 이제 재개발 진행은 될 테고,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탄 거니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목돈을 쥘 수 있어요, 이렇게 달래서 집에 보내. 그리고 사건 추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만히 지켜 봐. X란 사람, 완전 지능범 타입이야. 회장님, 아니지, 회장 사모님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는 손가락 까딱 안하고 다른 사람들 시켜서 이득을 취하는."

"좀 으스스한 사람인데요. 음험한 성격에 음침한 외모."

"밥팅아, 이런 사람들 일수록 겉모습은 소박하고 순수하게 보이는 법이야. 아무튼 X가 가만 보니 범인씨는 절도 중 발각되어 살인을 저지르고 아줌마를 공격하려다 되려 목숨을 잃은 걸로 처리되고, 아줌마는 정당방위로 나올 거 같은 거지. 면회 갔던 동생한테 들으니 완전 맛이 가서 제대로 말도 못한다 하니 이대로만 가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 했을 테고. 그래서 첫 공판 때 무슨 얘기가 나오려나 몰래 방청을 갔겠지. 거기서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 아줌마가 살인죄로 기소된 거야. 범인씨는 그냥 절도범이 아니라 스토커였다 거론되고. 아줌마가 충격에 빠져 어버버하니 검사가 요거 껀수다 하고 낼름 시나리오를 쓴 걸 X는 바로 눈치 챘어. 이거 잘못 꼬이면 큰일이다 생각하고 바로 변호사를 물색해. 거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떠오른 게 너야."

"잠시 만요, 얘기가 이상하게 연결되는데요?"

"아까 얘기한대로 검사 주장에는 물증도 없거니와 논리 비약이 엄청 심하잖아. 조금만 신경 써서 뜯어보면 누가 봐도 시나리오가 엉성하지. 아줌마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그런 황당한 얘기와 다투려면 보통은 보다 더 말이 되는 얘기를 찾아내려 할 거잖아. 이상한 할머니가 너한테 해준 얘기를 떠올려 봐. 그 이야기랑 비슷하게 혼자 사는 남자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를 만나고, 남자가 여자를 구해내려고 남편을 없애버리는 이야기 말이야. 그건 아주 유능한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검사의 기소내용을 듣고 나면 대안으로 떠올려 볼 만한 유력한 시나리오야. 그런 이야기들 사회면 같은데 많이 나오잖아. 이 시나리오의 문제라면 결과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인데, 그건 순간 정신적인 충격으로 섬망상태에 빠진거다 또는 너무 어두워서 다가오는 남자가 일면식 없는 살인마인 줄 알았다 식으로 빠져 나가면 될 테지. 만일 이 시나리오를 변호사가 제시했다 쳐 봐. 해서 1심에라도 이겼다 치자고. 어차피 정당방위 판결 가능성이 많은 거 아니야. 검찰 측에서 아줌마가 범인씨를 죽인 것은 정당방위가 맞다고 인정하더라도, 남편을 없애기 위해 범인씨와 공모해서 살해한 것이다 라고 다시 소를 제기할 가능성이 생기지. 판결이 이 방향으로 나는 날에는 재개발은 물 건너 가는 거야. 아줌마가 애인과 공모해서 남편을 살해했다고 치면 재산상속 순서에서 제외 되는거 맞지? , 그래. 그러면 동생도 상속제외. 상속 순위에 맞는 남편쪽 친지들 찾고 지분 쪼개고 어쩌고 하다보면 사업은 나가리 나는 거지 뭐."

"그런데 이 시점에 저는 왜 등장하는 건가요?"

"'분명 X는 집안도 좋고 재력도 있는 발이 넓은 사람일 거야. 아는 사람들한테 수소문 한 거지. 주변 변호사 중에 세상물정 잘 모르고 법만 디리 파서 법리논쟁만 하려 드는 사람 없는지 넌지시 알아 봤겠지. 검사 얘기를 듣고도 앞뒤가 맞는지 안 맞는지 증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관찰하기보다 야간의 흥분상태에서 한 행위가 어쩌니 오상방위니 하는 법 얘기로 논쟁하려는 멍청이가 어디 없나 했는데 오, 마침 여기 있구나!"

"..."

"그래도 너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정도 지능은 있으니까 구제 불가능한 멍청이는 아닌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그다지 위로가 안 됩니다."

", X는 동생을 시켜서 변호사를 바꿔 선임하도록 해. 동생에게는 속내를 감추고 알아보니 어디어디에 있는 현성호라는 변호사가 굉장히 유능한데 수임료도 싸다고 하더라, 언니를 위해 변호사를 바꿔 주는 게 좋겠다 이리 유도했겠지. 자신이 짐작한대로 움직여 줄 런지 궁금해져서 니 공판에도 왔어. 동생하고 마주쳐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평소랑 다르게 입고 머리도 촌스럽게 하고 화장도 바꿨겠지. 당연히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어. 오직 멍청이 변호사가 멍청한 짓만 하길 빌면서 쳐다보고 있지. 사람이 주변시로 다른 사람 시선을 인지하는 능력, 타인의 얼굴과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은 정말 대단한 거야. 거기에만 별도로 관련된 유전자가 있다고 하더라. 나도 모르게 뒤통수에서 남의 시선을 느꼈다 이런 얘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닌 거지. 너 같은 모질이도 시선을 느끼고 눈치 챌 정도였으니까."

"그럼... X는 김옥선 할머니라는 얘기인건가요?"

"당연하지. 그날 공판에서 자기 포석대로 움직이는 널 보고 얼마나 좋았겠어. 그런데 끝나고 나서 니가 자기를 찾아올 줄은 몰랐을 거야. 보통 모르는 사람이 쳐다봤다고 찾아가서 말 걸고 그러지는 않잖아. 법리논쟁만 하는 게 아니라 무대뽀라는 얘기도 들었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대놓고 그런 얘기는 안했겠지. 속으로는 좀 당황했겠지만, 이리 좋은 기회가 제발로 찾아왔으니 실컷 이용하기로 한 거지. 해서 널 마음껏 가지고 논거야. 쯧쯧 혀를 찼다고? 당연히 널 부른 거지. 손가락의 반지 자국은 뭐냐고? 당연히 김중배의 다이아반지 같은 거 끼고 다니다가 법정에 올 때 잠시 뺀 거야. 그리고는 너에게 아줌마의 내면이 파탄 나서 곧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암시를 심어 놓지.“

왜 그런 일을 한 거죠?”

당연히 아줌마를 해치울 차례가 된 거지. 남편과 애인이 모두 죽었다는 슬픔에 마음이 망가져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해서 처리해버리고 동생이 집을 꿀꺽하고 김옥선 할머니는 재개발 걸림돌 제거계획 완수. ! 어디 가!”

당장 막아야죠!”

기다려. 일단 구치소에서 나와야 될 거 아니야. 내일 아침에 나오는 거 아니야? 가서 아줌마에게 오늘 들은 내용을 잘 확인해 봐. 혹시 알아? 그냥 소설로 끝날지.”

그러나 결국 누나의 이야기는 소설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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