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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홍주의 사건수첩 제 1탄 -
[운수 나쁜 날] (1/2)

글: 한동진  //  원안: 한상진

설홍주는 대단히 특이한 친구다. 보통의 조선 사내는 열 여덟이 되기가 무섭게 장가를 들어 스물이 되기 전에 애를 가졌지만, 그는 스물 다섯을 헤아리도록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결혼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공평하게 속박하며 인류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였고, 전통적인 중매결혼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태의연한 악습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연애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분노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변덕이고, 여성과의 연애는 쓸데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설군, 설마하니 여성의 지적 능력이 자네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날 아침, 내가 커피를 홀짝이며 이죽거리자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보게, 왕도손 군. 나는 유림에서 으뜸가는 성인으로 떠받드는 공자님처럼 편협한 남녀차별주의자가 아닐세. 오늘날 불란서의 마담 큐-리(퀴리 부인)는 여성의 사고력이 남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나. 하지만 말일세, 입맞춤을 구걸하는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서 편지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건 인간에게 두뇌를 선사한 조물주를 모독하는 행위라네. 그런 의미에서 시간낭비라고 말한 걸세."

"그런가? 하지만 요즈음은 자네 역시 두뇌를 많이 쓰는 것 같지 않더군."

신랄한 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설홍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숙련된 요리사라 할지라도 재료가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어. 그리고 요리사에게 필요한 게 야채와 고기라면 내게 필요한 건 사건이라고, 사건! 해결해야 할 사건이 없는데 대체 무슨 놈의 두뇌를 쓴단 말인가?"

"이 친구야, 자네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은 줄을 섰다고. 그런데 의뢰가 들어오는 족족 거절하면서 사건이 없다고 한탄하는 게 말이 되나?"

"왕도손 군, 만일 자네 환자 중에 어깨가 아픈 사람이 있다면 침을 놓고,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탕약을 처방하겠지. 하지만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진 사람이 자넬 찾아온다면, 한의사가 아닌 외과 의사를 찾아가라고 권하겠지. 그래야 옳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설홍주는 포켓에서 담배 한 대를 빼어 물며 말을 이었다. "헌데 날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져 오는 사건들 대부분은 기민한 두뇌 회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열을 올리며 뛰어드는 건 머리가 모자란 왜경(일본 경찰)들뿐이지. 나는 그런 사건엔 손톱만치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고. 그러니 거절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

그는 성냥을 꺼내 담뱃불을 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몸을 기대면서 창문을 열었다. 싸늘한 초겨울 바람이 두 뺨을 간질였고 시선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맴돌았다. 그리고 멍하니 벌린 입에서 솟아오른 한 움큼의 연기는 새파란 아침 하늘에 뭉게구름을 그렸다.

"입맛에 맞는 사건이 들어올 때까지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나는 신문을 집어 들면서 빈정거렸다.

"나라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반기고 있는 건 아니야. 지적 흥분을 일으킬만한 사건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탓에, 이젠 학교 후배의 상담역으로 전락해 버릴 위기에 처했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설홍주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책상으로 손을 뻗어 구깃구깃 접힌 한 장의 전보용지를 집어 들었다.

"엊저녁에 내 고등학교 후배한테서 이런 전보가 왔다네."

그 내용인즉슨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설홍주 선배님께,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 내일 오전 열 시에 방문토록 하겠습니다. 김수영 배상 -

"이 김수영이란 친구는 누군가?"

내가 전보용지를 쳐다보며 묻자, 설홍주는 담배 연기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이렇게 답했다.

"경기고 후배로 경성에서 열렸던 동문회 모임에서 몇 차례인가 만난 적이 있지. 지금은 일본 유학 중인 걸로 알고 있네만, 방학을 틈타 돌아온 모양일세."

"말하자면 자네와 같은 지식인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군."

나는 벽시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간은 이미 열 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시간에서 삼십 분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지식인답지 않게 무례한 행동이 아닌가."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이제 곧 알 수 있을 거야."  설홍주는 손에 든 담배로 창 밖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지금 막 도착한 것 같거든."

창 아래 좁은 길에 세워진 인력거에서 검은 학생복을 입은 젊은이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굽실거리는 인력거꾼에게 삯을 치른 뒤에, 우리 하숙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어서 들어오게나." 설홍주는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목청을 높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과연 아까의 학생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한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시간을 지키지 못하여 참말로 죄송합니다."

그는 학생모를 벗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설홍주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조금 늦은 것 가지고 일일이 사과할 필요는 없네. 게다가 오늘 아침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집안일이 서툰 식모가 국물을 엎지르질 않나, 고양이가 발톱으로 할퀴어대질 않나, 자전거 타이어가 갑자기 빵꾸가 나질 않나, 급한 대로 인력거를 탔지만 빙 돌아서 오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지 못했겠지."

그러자 김수영이 입을 떡 벌리고 외쳤다.

"아니, 그걸 어떻게 다 알고 계신 겁니까?"

"그야 간단하지." 설홍주는 김수영의 오른쪽 손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수를 하다 보니 엄지손가락뿌리에 옥도정기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 게 눈에 띄더군. 그런데 그 밑으로 두 갈래 가느다란 상처자국이 삐뚤빼뚤 지나가고 있더군. 연필을 깎다가 칼날에 베였다면 손가락뿌리가 아닌 손끝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그 자국도 날카로운 직선을 그렸겠지. 데리고 놀던 고양이가 변덕스레 발톱을 세우고 할퀼 때에만 그런 상처가 생기는 법이지."

"선배님의 눈썰미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군요. 실은 어젯밤에 어머니가 키우는 고양이를 붙잡으려다가 손등을 할퀴고 말았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집 식모한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요리도 못하고 청소도 못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계집애죠. 오늘 아침엔 밥상을 내오다가 제 무르팍에 국그릇을 엎질러 버리기까지 했죠." 그 대목에서 김수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나올 때 틀림없이 바지를 갈아입고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가 입고 있는 윗도리는 말끔하게 다림질되었지만, 아랫도리는 좀 지저분한데다가 구김살도 제대로 펴지질 않았더군. 아무래도 윗도리와 짝이 맞지 않는 것 같았어. 그래서 눈을 아래로 내려보니 왼쪽 양말에 고기국물이 한두 방울 튄 흔적이 있더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밥상을 받을 때, 국그릇이 엎질러지거나 해서 묻은 거겠지. 그래서 급히 바지를 갈아입고 나온 거라고 추리할 수 있었네." 설홍주는 손을 들어 김수영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윗도리,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포켓트 단추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덜렁거리더군. 자네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어머니나 누님이 아침 밥상을 내오거나 단추를 다는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어. 아마도 식모였겠지. 국그릇을 엎지르고 단추도 제대로 달지 못하는 식모라면 집안일이 서툴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럼 자전거 타이어가 터진 건 어떻게 아셨죠?"

"자네는 3년 전에 무려 30원(현재 시가로 약 100만원)이나 하는 자전거를 살 정도로 자전거에 미쳐 있었지. 유학을 떠날 때, 그건 동생에게 맡겨두고 간 걸로 기억하네.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그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을 거야. 헌데 그러지 않고 인력거를 타고 왔다면, 자전거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라고 봐야겠지. 자전거에 가장 흔한 문제라면 역시 타이어 빵꾸 아닌가, 아마 자네 동생이 타고 다니다가 빵꾸를 내거나 했겠지." 설홍주는 창 밖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 집에서 여기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네. 그런 길은 인력거꾼들이 별로 좋아하질 않아. 올라갈 때는 힘들고 내려갈 때는 위험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평평한 길만 골라서 다니지."

"역시 설선배님답습니다. 전 또 무슨 투시술이나 독심술 같은 마술이라도 부리신 줄 알았죠."

김수영은 유쾌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설홍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술은 눈속임이지만 추리는 강철 같은 논리에 입각한 과학일세. 요령을 모르면 뭐든 신기해 보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자리에 앉게나."

김수영은 망토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설홍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 이 분은 뉘십니까?"

"아, 이쪽은 중국 한의사이자 제 절친한 친구인 왕도손일세. 3년 전에 조선 한의학을 배우러 와선 아예 여기 눌러앉은 친구라네. 자, 어서들 인사 나누시게."

나와 김수영이 서로 자기소개를 주고받으며 악수를 하는 사이에, 설홍주는 다시 담뱃갑을 꺼냈다.

"행여나 비밀스런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이 친구는 중국인답게 입이 무거우니까."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오늘 선배님께 의뢰하려는 사건은 전혀 기밀을 요하는 게 아니니까요. 도리어 할 수만 있다면 조선 천지에 널리 알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가? 어떤 얘긴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담배라도 한 대 태우면서 얘기해 보게나."

김수영은 설홍주가 내민 담배를 받아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뭉글뭉글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3년 전에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일본 유학 경험이 있으니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나 지역별 모임에 가입하는 게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와세다 대학의 아이스하키 구락부와 경기회란 모임에 적을 두고 있었죠.
경기회의 정식 명칭은 '재관동 유학생 경기 친목회'였습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경제대, 메이지대, 와세다대 등 관동 지역 대학에 다니는 경기도 출신 학생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이죠. 회원 숫자는 서른 명 가량인데, 거기서 사귄 친구 중의 하나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허명주였습니다.
허군은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 재작년에 메이지 대학 일문학과에 입학했는데 나이는 스물 하나로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작년 말부터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이런저런 부업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그때부터 경기회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허군은 가진 재주가 많아서 우리들 사이에선 재간꾼으로 통했습니다. 말재간이 탁월한데다 장기나 바둑 같은 잡기에 능하고, 뜀박질도 잘 해서 역전 마라손(마라톤) 대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죠. 사람됨도 듬직하고 착실하여 믿을만한 친구였죠.
3주 전, 정확하게는 11월 21일, 경기회는 아카사카의 요정에서 조촐하게 모임을 가졌습니다. 전부 열 댓 명이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허군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술이 입에 착착 달라붙어서 얼마 가지 않아 다들 거나하게 취했습니다. 특히 허군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지경이었죠.
우리는 벽시계가 11시를 가리킬 무렵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총무가 레지(계산대)에서 술값을 치르는 사이에 허군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문 옆의 좁은 복도로 향하더군요. 저는 목소리를 높여 물었죠.
[자넨 또 어딜 가려는 건가?]
허군은 고개를 돌리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려고. 물만 빼고 나올 거야.]
그는 복도 끝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잠시 후, 문 안쪽에서 소변 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잦아들었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화장실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메이지대 의학부의 유영식군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문을 두들겼습니다.
[허군, 아직도 멀었나? 안에서 대체 뭘 하는 건가?]
그리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니, 이 친구가 어딜 간 거야?]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가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들어보니, 정말로 그 안은 텅 비어 있더군요."

김수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가 미처 연기를 토해내기도 전에 설홍주가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화장실 안에 다른 출구는 없었나? 이를테면 환기창 같은 거 말일세."

"물론 변기 위에 조그만 환기창이 붙어 있었죠. 남자 하나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창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거기로 빠져나간 다음에 바깥에서 창문을 닫은 거겠지." 설홍주의 지적이었다.

"제 얘기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환기창을 열고 바깥을 확인해 봤습니다.
창 밖에는 건장한 장정 하나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동서로 뚫려 있었습니다. 동쪽 끝엔 높은 철책이 세워져 있었지만 20미터쯤 떨어진 서쪽 출구는 큰길로 통했죠. 헌데 그 유일한 출구는 때마침 주차해 있던 택시에 가로막힌 상태였습니다. 운전수는 차창을 열고 태평스레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저는 즉시 환기창을 빠져나가 택시로 달려갔습니다.
[이봐요, 혹시 학생 하나가 이쪽으로 지나가는 걸 보지 못했습니까?]
운전수는 담배를 문 채 저를 흘깃 쳐다보더니 퉁명스레 대답했습니다.
[못 봤소.]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니 운전수는 벌컥 화를 냈습니다.
[여보쇼, 사람 말을 못 믿겠다는 거요? 내 눈이 썩은 생선 눈깔인 줄 아쇼? 내가 아까부터 여기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면서 저 골목길을 쭉 지켜봤지만 도둑고양이 하나 지나가지 않았수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달리 사람이 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좌우로는 건물이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늘어서서 종이 한 장 들이밀 틈도 보이지 않았죠. 길가에 면한 창문은 전부 단단히 닫혀 있었습니다. 길바닥엔 그 흔한 맨홀 뚜껑 하나 붙어 있지 않았고요. 동쪽 끝의 은행 건물을 둘러싼 철책은 높이만 3미터를 넘으니 장대높이뛰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넘어갈 수가 없겠더군요. 아니, 그 이전에 택시 운전수의 눈에 띄지 않고서는 어디로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단 말이군." 설홍주가 중얼거렸다.

"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우리는 그 길로 운전수와 함께 가까운 경찰서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신고를 접수한 순사는 수사를 하긴커녕,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이봐요, 술 취한 사람이 잠깐 모습을 감춘 것 가지고 일일이 경찰을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아마 머리 끝까지 술에 취해서 남의 집 창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철책을 뛰어넘거나 했겠죠. 내일 아침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걱정들 하지 말고 돌아들 가세요.]
하지만 그 사람의 말과는 달리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허군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흘째 아침, 저와 유군은 요요기 2정목에 있는 허군의 하숙집에 찾아가 봤죠. 주인장의 말로는 요 며칠간 허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정사정해서 잠긴 방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과연 사람이 드나든 행적이 없더군요.
다다미 6조(약 2평) 남짓한 방에 가구라 할만한 것은 사과 궤짝보다 못한 낡은 책상과 쓰러질 것 같은 책장, 그리고 옷장이 전부였습니다. 유군은 책상 위에 얇게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훑어서 확인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사나흘 동안 들어오지 않은 게 맞는 모양이군.]
우린 다시 경찰에 찾아가서 실종 신고를 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별 일 없을 거라는 둥, 곧 돌아올 거라는 둥, 별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죠. 하지만 3주가 지나도록 허군은 돌아오지 않았고 소식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김수영은 거의 끝까지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짓눌렀다.

"그래서 방학을 틈타 돌아온 김에 날 찾아왔단 말이군."

설홍주의 말에 김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예, 아시아에서 첫째 가는 도시로 손꼽히는 동경 시내 한복판에서 사람이 연기처럼 증발했는데도 불구하고, 왜경들은 제대로 된 수사를 펼치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인 유학생이 사라진 사건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어쩌면 해결할 자신이 없어서 지레 포기한 건지도 모르고요."

"그럴 수도 있겠군." 설홍주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믿을 거라곤 같은 조선인인 선배님밖에 없습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이 사건을 맡아 허군의 행방을 추적해 주십시오."

김수영은 깊이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설홍주는 눈을 멀뚱거리며 그 모습을 쳐다보더니만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김군,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군."

그러자 김수영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비용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회장과 총무하고 얘기를 끝냈는데, 선배님께서 사건을 수임해 주신다면 동경 여행 비용과 체재 비용을 포함한 일체의 경비를 다 지불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닐세. 그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거든."

"아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도 왜경들처럼 허군이 돌아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실은 이미 사건을 해결해 버렸다네."

설홍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나와 김수영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봐, 설군. 농담하지 말게. 현장에 가 보지도 않고 허군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면박을 줬지만 설홍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김수영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허군이 자네한테서 돈을 빌린 적은 없나?"

"예, 생활이 어려울 때마다 조금씩 돈을 빌렸습니다. 다 합치면 이럭저럭 백 원은 될 겁니다. 뭐, 친구 사이에 그 정도 빚은 질 수도 있는 거죠."

김수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설홍주는 담배를 꺼내 들면서 입을 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허군은 다른 친구들한테도 그만한 빚을 졌을 걸세. 다 합치면 천 원, 아니, 어쩌면 이천 원 이상일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씀입니까?"

"능력 이상의 큰 빚을 지게 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으려는 의욕을 상실하고 어떻게든 쉽고 빠르게 탕감 받으려는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일세. 즉, 도망친다는 말이지."

그러자 김수영이 그 말에 동감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가로저으며 불쾌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잠깐만요, 선배님. 그게 하나의 동기가 될 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화장실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 수수께끼는 여전히 설명이 안 되잖습니까?"

"수수께끼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담배를 문 설홍주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어 보도록 하지. 화장실 문이 닫혀 있었으니 허군은 당연히 환기창으로 몸을 뺐을 거야. 그런데 환기창 아래 골목길은 세 방향이 막혀 있었지. 한쪽 끝은 철책이, 양 옆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정확하게는 네 방향입니다. 반대쪽 끝에 택시가 서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택시 운전수는 허군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게 중요한 점이지. 어째서 택시 운전수는 허군을 보지 못했을까? 대관절 허군은 어디로 간 걸까?"

설홍주는 성냥을 성냥갑에 그었다. 칙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 올랐고, 뒤이어 뭉게뭉게 담배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는 손을 흔들어 성냥불을 끄면서 해답을 제시했다.

"답은 아주 간단해. 택시는 장애물이 아니라 관문이었어. 즉, 허군은 한쪽 문을 열고 택시에 들어가 반대편 문을 열고 내린 걸세. 그리곤 유유히 큰길을 따라 내려간 거야. 택시 운전수는 그걸 보고도 못 본 척 한 거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김수영을 대신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택시 운전수가 김군을 속였단 말인가?"

"어떤 사건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목격자는 둘 중 하나야. 눈을 감고 있었거나,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설홍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아마 허군은 미리 택시 운전수를 매수해서 그날 밤 11시경에 골목길 끝에 차를 주차해 두라고 일렀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딱 좋은 위치에 택시에 서 있을 리가 없잖아?"

"정말 간단한 속임수로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속임수는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좋다네. 복잡한 속임수일수록 여기저기 증인을 남기고 증거를 흘릴 수밖에 없고 그만큼 빨리 들통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속임수는 어지간해선 발각되지 않아. 왜냐하면 피해자들이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마치 김군, 자네처럼 말이야."

설홍주의 명쾌한 해설에 김수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요컨대 허군과 운전수가 한패가 되어 우릴 보기 좋게 속여넘긴 거군요."

"그렇지. 난 사실 허명주군이 진짜 유학생인지조차 의심스럽네. 학적부에 이름만 올린 휴학생처럼 편리하고 불확실한 신분도 없거든. 자네가 알고 있는 허군은 진짜 메이지대 휴학생인 허명주의 이름을 사칭한 사기꾼일 걸세. 더 늦기 전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경찰에 신고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래야겠군요. 당장 친목회 사람들한테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수영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요즘 제 주변에 불가사의한 실종 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머릿속이 뒤숭숭해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거든요. 사기꾼한테 속아넘어간 거라니 차라리 안심이 됩니다."

"실종 사건이 잇달아 터지다니?"

김수영은 탁자에 놓여진 신문을 펼치더니 제 1면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바로 엊그제 터진 이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그 손가락 끝은 [거부(巨富) 유원기 씨 의문의 실종, 경찰은 침묵]이란 표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집어 들고 기사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이틀 전 12월 13일 저녁 7시경, 경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 유원기(남자, 나이 55세)씨가 인력거를 타고 귀가하던 도중에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씨는 경기도 파주군 일대에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로, 2년 전에 가족과 함께 경성으로 이주해 왔다. 농장 일은 동생 유원익(남자, 나이 50세)씨에게 맡기고, 유씨 자신은 정릉에 대저택을 짓고 살면서 부동산업과 포목점 사업에 집중했다.
사고 당일 오전, 유씨는 집에서 쓸 일용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아내 장미화(여자, 나이 49세)씨, 식모 안정민(여자, 나이 19세)씨와 함께 미쯔꼬시 백화점(현재의 신세계 백화점)에 갔다. 유씨는 죽첨정(현재의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의 택지를 매입하는 일로 부동산 업자인 김영택씨를 저녁 8시에 동대문의 끽차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저녁 7시 즈음에 바리바리 물건을 사든 아내와 식모는 먼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씨는 혼자서 인력거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백화점 앞에서 가로등을 수리하던 전기 기술자 가네무라(26세)씨는, 유씨로 추정되는 풍채 좋은 조선인 남성이 인력거에 타면서 큰소리로 '동대문'을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인력거에 탄 것을 마지막으로 유씨는 종적을 감췄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5시가 되도록 유씨가 나타나지 않자, 화가 난 김씨는 어찌된 영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정릉 저택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유씨가 약속 장소는 물론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도록 유씨가 귀가하지 않기에, 김씨는 가족들에게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했다.
어제 오전에 실종 신고를 받은 경찰은 이 사건을 최우선 해결 과제로 규정하고 의욕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경찰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꿔 수사진을 철수시키고 수사진 전원에 함구령을 내렸다.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유력한 기업인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제국 신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 침묵을 고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우리 신문에서는 경찰이 책임감을 가지고 사건을 수사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바이다."

내가 신문에서 눈을 떼기가 무섭게 설홍주는 껄껄대며 웃었다.

"과연 신문기자의 견식은 접싯물보다 얕고 길가의 돌덩이만큼이나 보잘것없군."

"무슨 소린가?"

"유씨는 실종된 게 아니라 유괴된 거야. 가족들한테 몸값을 요구하는 전갈이 왔기에 경찰도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게지. 자칫 잘못하다간 범인을 자극해서 유씨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설홍주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상식적인 것도 모르는 주제에 기사랍시고 이것저것 써 갈기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지. 이런 기자들 때문에 조선의 신문이 2류, 3류 신세를 면치 못하는 거야."

"설선배님 말씀대로입니다." 김군이 머리를 주억이며 말했다. "유원기 씨는 방금 전의 이야기에 등장한 메이지대 유학생 유영식군의 아버님 되십니다. 어젯밤에 이 일로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협박장을 받은 뒤였죠. 제가 설선배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지만 아버님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이 염려가 되어 차마 움직이질 못하더군요. 경찰에 신고한 것조차 후회하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몸값은 얼마나 요구한 것 같나?"

"듣기로는 1만원(현재 시세로 약 3억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커피잔을 떨어트릴 뻔 했지만, 설홍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꽤 비싸게 불렀군. 제아무리 대지주라도 하루 이틀 만에 준비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군."

"예, 유군은 아무래도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다며, 그 동안 아버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더군요." 김수영은 설홍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안 어떻게든 유군을 설득해서 선배님을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왜경보다는 선배님이 훨씬 믿음직스러우니까요. 허군 사건을 앉은 자리에서 해결했다고 말하면 유군의 생각도 달라질 겁니다."

"유괴 사건은 아무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사건이니 가족의 동의 없이 함부로 달려들긴 어렵지. 유군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연락 주게나."

김수영은 그 뒤로 몇 마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다른 볼 일이 있다며 몸을 일으켰다. 설홍주는 문 밖에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다시 안락의자로 돌아와 앉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돈만 주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아이스하키나 치고 삐루(맥주)나 마시는 주제에 학생복은 꼬박꼬박 챙겨 입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내 후배지만 정말 한심한 친구야. 게다가 일백 원을 떼이고도 푼돈을 잃은 듯이 대범하니 저렇게 금전 관념이 희박해서야 뭘 하겠나. 기껏해야 나중에 아버지 재산이나 까먹으며 본정통을 주유하는 혼부라(주1)가 되기밖에 더 하겠나."

"그거야 저 친구 자신이 걱정할 문제지. 어쨌든 자리에 앉은 채 멀리 동경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실종 사건을 단숨에 해결한 자네 능력엔 감탄을 금할 길이 없네그려."

내 칭찬에도 불구하고 설홍주의 얼굴에 잡힌 주름살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글쎄, 모든 수수께끼를 다 해명한 건 아닐세. 허군이 그렇게 요란하게 자취를 감춰야 했던 이유가 뭔지, 아직 그걸 모르겠단 말씀이야. 보통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할 때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도망치는 법이거든."

"뭐, 자네라 할지라도 사기꾼의 심리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야 없겠지." 나는 다시 신문을 펼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실종 사건 때문에 경찰이 골머리 꽤나 썩히겠군. 사람들의 이목이 적지 않은 경성 시내를 달리던 인력거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지."

"아마 그 인력거꾼은 범인들과 한 패일 거야. 하지만 피해자 가족이나 경찰에게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모를까, 빈약한 신문기사만 가지고선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 어렵겠군."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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