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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적인 수수께끼 추리물은 아니고요...
심리적인 소설의 분위기를 내려고 많이 노력한 소설인데요...
정말 예전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몇 년 전에 신춘 문예 용으로 쓴 글인데....
아쉽게도(?) 탈락이...
제 생각엔 단편의 분량으론 좀 짧아서 고배를 마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틀림없습니다....

암튼 재미나게 읽으시고..
답글이든, 댓글이든 많이 올려 주세요....^^




가계부 일기
(신경국 작)



4월 13일
가끔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라고 있는 일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난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 지금의 행복이 있기 전에 큰 고통이 있었으므
로, 어찌보면 지금의 나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전의 시어머니는 날 '지아비 잡아 먹은 년'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업자득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다는 말을 몸소 보여준 인간으로부터 겨우 벗어나,
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길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채, 난 일련의 사건들로부
터 시달려야 했다. 어릴적부터 날 괴롭혀 왔던 꿈들이 되살아 났으며, 경찰
들의 취조, 시댁으로부터의 질타, 주위 사람들의 위안섞인 잔인한 호기심들
이 지난 18개월간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감싸준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난 잊으려고 노력했고, 무관심해지려
고 노력했으며, 용감해지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눈에 띄게는 아니었지만 그
야말로 '눈꼽만큼씩' 내 상처는 아물었고, 악몽으로 점철된 내 기억도 퇴색
되어 갔다. 그 속도에 맞추어 난 바라던 해방감을 맞았고, 자유로움을 받아
들였으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아내'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결혼13개월만
에 과부가 된 스물 일곱 살의 여자를 신부로 맞는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쉬
운 일이 아니다. 상대 남자가 비록 상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말이
다. 남자의 허물은 덮어 주어도 여자의 실수는 그것이 고의적이지 않고 아
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 것이 아직까지의 현실이라는 것
을 생각하면, 내 남편의 행동은 무척이나 용기있는 결단이었다.
그가 가졌던 용기에 대해 스스로가 실망하지 않게 하려고 나는 무척 노력
한다. 그가 내게 준 사랑과 신의는 나의 전 남편이 물려 준 구속감과 그에
부속된 공포를 덮고도 남는다.
난 눈을 감고 외친다. 영원히 그를 사랑하겠습니다. 그를 절대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영원히 그의 아내로 남겠습니
다. 마치 결혼 서약문같다. 죽음이란 말이 이젠 무섭게 들리지 않는다. 마
치 오래된 친구같다.


4월 19일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특히 그 친구의 말들이
무의식적인 악의를 품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녀는 다소 이기적이고 때로
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알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을 때
가 있다.
그녀는 나를 대학 시절부터 알아 왔고, 나의 과거와 나의 불행했던 첫 번
째 결혼, 그리고 나의 최근의 근황에 대해 쉴 새 없이 질문과 수다를 늘어
놓고 있었다. 난 나의 나쁜 기억들을 들추어 내며 자신의 잔인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그 친구의 입을 커피잔으로 틀어 막고 싶은 충동을 몇번이나 참
아야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내 전 남편의 증세와 그것에 대한 그리 깊지
않은 지식들을 자랑하듯이 끊임없이 떠벌였다.
지금 나는 불신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사랑하고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잔인한 행동이다. 질투가 푸른 눈을 가진 악마라면 불
신은 그 악마가 가지고 있는 길고 날카로운 낫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가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일 것이다. 그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불쌍하고, 고독하고, 외롭고, 추하고,어리석고
상처받은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처럼......
그에 대한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다행이다. 엄마의 모습
은 가끔 꿈 속에서 보곤 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행복해 보인다. 나 또한
행복하다. 밤마다 나는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5월 6일
토요일이면 남편은 항상 7시에 귀가한다. 그를 위한 저녁상을 차릴 장을
보기 위해 시장에 다녀 왔다. 수수와 콩을 섞은 현미밥에 두부와 솎음 배추
를 넣은 된장국, 깻잎찜, 쇠고기를 곁들인 호박선, 알타리 김치와 은대구살
튀김. 훌륭한 식단이라고 생각한다. 단백질이 매우 풍부하고 섬유소도 많
다. 밤초를 위한 계피도 잊지 않았다.
난 그를 위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요리를 한다. 나의 엄마도 항상
그랬었다. 아버지를 위해 장을 담갔고 김장을 했으며, 딸을 낳았다. 하지만
나와 엄마가 다른 점은 난 지금 행복하고 엄마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슬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장에 다녀와서 전화 응답기를 들어 보았다. 남편의 아무것도 아닌 메시
지가 있었다. 세 개 씩이나. 세 번째 것은 약간 짜증난 투였다. 내가 시장
에서 돌아온 것은 네시 사십분이었다. 고작 세 시간 집을 비운 것 뿐인데.
그래도 난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해줄 수 있다.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다.

5월 10일
오늘은 이주일에 한 번 있는 진료날이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첫
번째 결혼과 연루된 가장 마지막 것이다. 그러나 그 진료도 약 팔주일 정도
면 끝이 난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게 좋다는 심리 치료인데, 내가 생각하
기로는 돈을 낭비하는 행동이지만 남편의 기분이 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
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응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씩 말같이 길쭉한 얼굴
에 토끼 이빨을 한 의사를 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날 유심
히 바라보는 그 남자의 시선이 나는 딱 질색이었는데, 오늘은 반갑게도 전
혀 그와 마주할 필요가 없었다. 남녀 두 명이 출연하는 싸이코 드라마를 보
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싸이코 드라마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지나치게 어두운 조명과
세련되지 못한 연기로 다소 조잡한 극이었다.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던 그
쑈는 의처증에 걸린 남편과 그 아내에 관한 것이었는데, 남편은 어처구니
없는 의심을 갖고 아내를 괴롭히고 있었으며, 여자는 미련스럽게 잘도 버티
고 있었다. 더 심한 것은 그 남편이란 작자가 때때로 아내에게 폭력적이 된
다는 것이었다.
연극이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남자 배우의 얼굴과 피투성이의 낯익은 얼굴
이 오버랩되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 난 너무나 놀라 눈을 감고 말았
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그 환상이 간간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극 의 막바
지에 이르러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매를 맞는 장면이 나왔는데, 나는 겁에
질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리고 난 그 곳을 빠져 나왔던 것같
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난 어딘가 돌아 다니다가 집에 돌아왔
다. 난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들어 왔는데, 어디서 무엇을 샀는지 전혀 기억
할 수가 없었다. 우습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비로소 제 정신을 차리고는 난
내가 산, 어쩌면 훔쳤을지도 모르는 그 물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작고 날카로운 등산용 칼이었다. 난 너무나  당황해서는 필
요하지도 않을 그 물건을 경대의 제일 밑 서랍의 구석에 숨겨 놓았다.

5월 11일
악몽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보였고 엄마가 보였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소
리치며 그녀를 때리고 있었다. 난 그것을 보며 엄마에게 외치고 있었다.
"엄마, 경대 서랍을 열어봐요."
잠에서 깨어서는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아마도
어제의 싸이코 드라마 탓이리라. 역시 돈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5월 16일
인생에 있어 우연이란 그리 드물지 않다. 상관있어 보이는 일들이 일련적
으로 일어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겨울 장화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
는데, 겨울 부츠를 세일한다는 신문 전단을 본다거나, 구두 상품권을 누군
가로부터 선물받는 일도 있다.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고 거리에서 잔돈을 바
꾸기 위해 우연히 집어든 것이 헤이즐넛 초코바이고, 친구들과 들른 맥주집
의 모듬인주 속에서 소금에 절인 아몬드, 땅콩들과 더불어 구운 헤이즐넛을
발견하는 일등이 그렇다.
오늘도 그랬다. 라디오를 켜니 가정문제를 상담하는 프로그램의 주제가
'의처증'이었으며, 매일 방송되는 TV시트콤의 주제는 '아내의 외도' 였다.
모두 지난 주에 보았던 싸이코 드라마 탓이다. 돈낭비라는 것이 확실해졌
다. 멀쩡한 사람 데려다가 불쾌한 기억이나 떠올리게 하고, 도대체 얻은 것
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남편에게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해 봐야겠다.

6월  2일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곁에 남편이 있다. 땅콩색의 꽃이 수놓아진 아름
다운 전등갓이 있고, 코 끝에 감기는 서늘한 아침기운이 있고, 따뜻한 태
양, 지저귀는 새, 몸을 부대끼며 소리를 들려주는 파란 이파리들이 있다.
어디선가 부지런한 동네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와의 사
이에 아기를 갖고 싶다. 남편의 잘생긴 외모를 닮은 건강한 아들을 낳고 싶
다.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식탁에 앉아 있는 내 앞엔 향긋한 커피 한잔
이 놓여 있고, 이런 자유와 안락함이 있는 현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난 벅
차다.
하루 하루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 진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모험과 같
은 것이라 여긴다. 원망과 잔인한 위로와 때로는 저주에 찬 말들로부터 날
구원해준 남자께 감사한다.
간단한 청소를 마치고 세탁소에 다녀와서는, 오후엔 그를 위한 특별 요리
를 마련해야겠다.

6월 16일
오늘은 반상회가 있었다. 보통 15일에 있으나, '파란 대문집 아줌마'의 맹
장염 수술로 하루 늦게 소집되었다. 저녁 준비 시간을 피하기 위해 오후 3
시부터 모임을 가졌다.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부녀회에서
재활용 비누 제조에 대한 안건을 꺼냈다. 간단한 다과가 있었고 약간의 수
다 끝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전화 응답기에 남편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런데 몹시 짜
증난 투였다. 세상에! 난 남자라도 집안의 일에 통달하지는 못할지언정 적
어도 관심이라도 갖길 바란다. 반상회가 언제 있는지, 혹은 어떤 사정으로
미루어 지는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너무 지나친 바램일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내들은 남편의 어떤 색 셔츠의 몇 번째 단추가
떨어진 것이라든가, 점심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내는 거의 초인적인
능력도 구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메뉴가 중복되지 않게 저녁상을 차릴 수
있으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는 고사하고 그는 샴푸며 몸비누를 매우 헤프게
쓴다. 고작 3시간 집을 비운 것뿐인데......
사랑과 관심이 지나칠 때엔 집착과 구속이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
억이 난다.

6월 20일
그 꿈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출했던 아이처럼 다시 내 품으로 파고든
다. 하지만 난 그 아이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를 보았고 피흘리는 엄마를 보았다. 꿈속의 영상은, 언제나 그렇듯
이, 내 머리속에 생생하다.
"도망쳐!"
엄마가 그렇게 외쳤다. 무엇으로부터? 왜? 지금은 명백하지만 꿈속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으리라. 때리는 아버지, 의심하
는 아버지, 잔인한 아버지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난 미친 듯이 울며, 뛰어
가다가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들고 얼굴을 쳐다보니 '그 남자'였
다. 확실했다. 그는 바로 내 첫남편이었던 것이다. 난 온 몸이 흠뻑 젖은채
잠에서 깨었다.
꿈의 영향으로 난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그 꿈을 다시 보게 만들었을까?

6월 22일
문명이란 매우 편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잘 사용하면 더없이 편하고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때론 우리의 목숨을 빼
앗기도하고 범죄에 사용되기도, 공갈이나 불유쾌한 장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난 전화벨 소리가 싫다. 사실은 남편이 집에 전화를 자주 거는 사실이 싫
다. 그는 왜 내가 집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다녀 왔는지 궁금해
하는 걸까?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왜 내 안부를 묻는걸까? 그는 자
신의 일이 있으면서도 왜 그 일에 몰두할 수 없는 걸까? 내 대답에 그는 왜
'정말이야?'하고 반문하는 걸까? 그는 왜 나를 믿지 못할까? 날 너무나 사
랑한다는 것이 가장 편한 대답일 것이다. 가장 편한 대답을 찾았음에도 불
구하고 왜 이리 마음은 불편할까?
사랑은 구속이 될 수가 있고 구속은 질투가 되고 질투는 여러 가지 불행을
초래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그런 일이 두번은 일어나
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6월 25일
오늘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내 뒤를 쫓아오는 것같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감색 양복에 짙은 선글라스로 적당히 변장을 한 모습이었지만
분명한 나의 남편이었다.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며, 특이한 걸음걸이는 분
명한 그였다. 난 무서워져서는 더 이상 뒤돌아 보지도 않고 집으로 곧장 돌
아왔다. 그 시각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사무실은 시내에 있으
므로 집이 있는 쪽으로 그가 볼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
고 그는 오늘 스트라이프가 있는 쑥색 양복을 입고 나갔다. 굳이 옷을 갈아
입을 필요가 무엇이었을까?
집에 오자마자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는 사무실에 '없었
다.'

6월 28일
또 다시 꿈에 시달려야 했다. 엄마는 피를 흘리고 옆에 쓰러져 있었고 난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해갔고, 무척 고
통스러워 보였으나 나는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검붉
게 물들더니 내 첫 남편의 얼굴로 변했다. 난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소
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속의 생각들이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콩나무처럼 자라나서 머리가 터질 것같았다. 그 중의 한가
지 생각으로 내 몸은 얼어 붙는 것 같았다.
또 다시? 두 번은 안돼......

6월 29일
익명의 장난 전화는 어떤 범죄 못지 않게 나쁜 것이다. 낮에 어떤 전화를
받았는데, 그 전화는 아무 뜻도 없는 더러운 욕지거리로 일관된 것이었다.
난 그 추악한 소리를 끝까지 들었는데, 그것은 말이 얼마만큼 더러워질 수
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로부터 누군가를 유추해 내기 위해서
였다. 상대방은 자기가 아는 욕은 모두 지껄였는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
다. 나도 수화기를 내려 놓고서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비음을 섞어가며 고음의 쇳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틀림
없는 내 남편의 목소리였다!
난 전화코드를 뽑아 버렸다.

6월 30일
꿈울 쫓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꿈속에서 나는 내 남편에게 말
하고 있었다.
"왜 날 의심하는거죠?"
남편은 대답대신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꾸었던 꿈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이......
괴로워서 깨고 말았다.

7월 6일
친구를 만나고 까페에서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막 떠나는 흰색 승용차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에 정발제를 치덕치덕 바르고 선글라스
를 꼈으며, 이번엔 검정색 터틀 넥을 턱까지 올려 변장하고 있었다. 그 노
력에도 불구하고 변장뒤에 숨겨진 추악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질투
와 불신으로 뒤집혀진 눈동자를.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으로부터 메시지가 있었다. 묻고 묻고 또 묻는다.어
디 있는지,무얼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돌아오면 사무실로 전화를 달라고
했으나 난 전화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전화기를 던져 버렸다.

7월 9일
일요일은 더욱 힘들다. 남편과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하니까. 난 동문회
를 핑계로 외출을 했다.
외출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남편이 내게 물었다.
"남편 동반이 아니라니 우습군.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나? "
거울을 통해서는 안 보였지만 그 목소리엔 분명 빈정거림이 있었다.  
"당신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하는 것 아냐? 동문중에 남자도 있나? 여학생밖
에 없는 학교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는 비열한 웃음 소리를 흘렸다.
난 내 감정을 숨기기 위해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 바람에 마스카라
브러쉬가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7월 19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무서움에 지치는 것도 이젠 지겹다. 꿈은 밤마다
찾아 온다. 남편 얼굴을 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참기 힘든 공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7월 22일
50여일 만에 체중이 1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입맛도 전혀 없고 어떤 일에
도 집중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속이 터질 지경이다.
내가 싫어하는 꿈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다. 부모님이 보일 때
도 있고, 죽은 첫 남편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누가 보이든지, 변함없는
것은 지금의 남편이 언제나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고는 없어 보인다. 엄마와 같이 얼룩진 삶을 살 수는 없다. 엄마는 그런 삶
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도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엄마가 이혼을 했을 때, 그녀는 고작 서른 셋이였다. 엄마는 재혼
을 하지도, 내가 알기로는 남자 친구를 만들지도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그녀
를 '화냥년'이라고 불렀다. 엄마에게 나는 아픈 과거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이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엄마는 나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
시키고, 보통 엄마들이 보여주는 애정의 몇 곱절을 내게 베풀어 주었다. 난
고마움보다는 오히려 미안해 했던 것같다. 난 엄마의 자식인 동시에 아버지
의 자식이기도 했었으니까. 내가 엄마의 곁에 있는 한, 아버지의 환영은 항
상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도 아버지는 우리 모녀를 괴롭혔다. 그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같았다.
그 무엇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 놓기 전에는.
심장이 약한 엄마는 내가 진학하던 해에 돌아 가셨다. 심장병이 있었기는
해도 엄마의 죽음의 원인이 아버지였다는 것엔 추호의 거짓이 없었다. 난
슬펐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고 한 달 후, 더 이상 장난거리가 없는 아버지
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술에 취한 채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인 것이다.
뺑소니였는데,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고통의 근원이 사
라진 데에 대한 해방감보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근원을 내 손으로 제거
하지 못한.
모르겠다. 첫 번째 남편이 여행지에서 추락사로 죽었을 때엔 그런 아쉬움
은 전혀 없었다. 내가 안고 있는 지금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아쉬움은 없
었으면 한다. 난 엄마같이 미련한 삶은 살고 싶지 않다. 그녀는 좋은 여자
였지만 독립적이거나 자주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전자 레인지가 또 작동을 하지 않는다. 내 남편은 전자제품 수리에 있어서
는 기술자 못지 않은 재능을 가졌다. 그 많은 회로며 갖가지 색깔의 복잡한
전기선들에 대해서 그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내 남편이 나를 위해서 그것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8월 15일
그것은 사고였다. 맹세컨대 그것은 사고였다. 남편은 전자 레인지를 고치
다가 전기 사고를 당했다.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난 그저 그것이 고
장났다고 말했을 뿐이며, 수리를 자처한 것도 바로 그였다. 수리를 하는 도
중에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한 것도 그였다. 커피 메이커의 플러그를 꽂는
다는 것이 전자 레인지의 플러그를 꽂은 것은 나였지만, 어쨌든 원인은 그
였다. 전자 레인지에도 뒷면에 '기술자 외에는 본체를 열지 마시오.'라고
씌여진 경고문이 붙어 있다.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번에 입었던 상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놓아야 겠다. 나프탈린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면 공기를 쐬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6월 1일
가끔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 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라는 일들이 거
의 한꺼번에 이루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난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 지금의 행복 전에 큰 고통이 있었으므로, 어찌보면 지
금의 나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고통으로, 그리고 악몽으로 점철된 나의 두 번째 결혼도 겨우 막이 내렸
다. 그리고 지금 나는 무척 행복하다. 연속적인 두 번의 결혼 실패로 좋지
않은 꼬리표는 결국 내가 갖게 되었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나의 남편은 그
의 나이치고는 매우 성공한 정신과 의사이다. 그의 외모나 재력, 직업이나
능력등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두 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한 스물아홉살의
그리 젊지 않은 과부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용기와 내게 보여주는 사랑만이 내게 의미있는 전부일 뿐이다.
난 그가 내게 가졌던 그 용기에 대해 보답하고자 무척 노력한다. 그가 내
게 준 사랑과 신의는 내 과거의 두 남자가 물려준 구속감과 그에 부속된 공
포를 덮고도 남는다.

7월 28일
내 남편의 권유로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나를 상
담하는 의사는 내 남편의 동료인데, 매우 친절하게 나를 대한다. 난 여전히
돈낭비란 생각이 들지만, 남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므로 열심히 치료를
받는다.
아무 죄도 없는 내 동전 지갑을 원망하기 전에, 우선 나의 건망증을 원인
으로 돌리고 싶다. 오늘 병원을 나서는데, 택시를 잡으려다가 내 잔돈지갑
이 진료실 안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병원에 다시 들어 갔는데, 의사의 사무실 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그가 통화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맹세컨대, 절대로 엿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생각이 맞는 것 같습나다. 의부증이라는 것은 다소 위험해 질 수 있
는 소지가 있죠...... 적당한 치료를 계속해야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맞습니다...... 예, 환자를 격리시키는 수도 있구요...... 심각한 정신
장애일수도 있습니다."
엉터리! 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잔돈 지갑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
다. 누구 얘기를 하는지는 알 것같았다.
역시 돈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오면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해야 겠
다.


                                                    < 끝 >


  • decca 2004.04.30 10:49
    잘 봤습니다. 좋은 걸요? ^^
  • 나혁진 2004.04.30 16:02
    재미있었습니다. 반전이 있네여...담 작품도 기대할게여..^^;
  • 귀염이 2004.04.30 16:27
    나쁜 말씀도 해주세요...
  • 지나가던 학생 2004.04.30 18:59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많이 잔인하내요.. 그리고 한번도 아닌 두번이나 사고로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된 사람을 누가 받아 줄까요??
  • 초이 2004.05.16 23:37
    재밌네요. 문장도 단문이라 쉽게 읽히고...근데 너무 사실 나열적이고 밀도가 좀 떨어지는 느낌이...그냥 제 생각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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