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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00:08

아리아드네의 실 16 (완결)

조회 수 5627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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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91187&volumeNo=16&genre=104

 

완결지었습니다. 휴;

뭐든 감상평 주시면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

 

난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냥 서성이고 싶었다. 햇수로 9년 정도 됐을까? 그때 그날과 무척 비슷했다. 건물 하나가 옆에 들어서긴 했지만, 나무 그늘은 침범당하지 않았다. 공을 차던 무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매미는 울고 있었다.

여고형은 그 이후 떠났다. 남은 닭을 가져가라는 예의상 권유도 마다하지 않았다. 닭과 함께 내 불안도 가져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후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여고형의 진지한 눈빛을 봤지만 마냥 믿을 수만은 없었다. 로매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지만, 어제 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멍하니 영화를 두 편이나 본 후에 쓰라린 속을 어루만지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는 가게로 가서 사이다 네 캔을 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모든 일이 끝날 거라면, 옛날 일을 더 진하게 우려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마음은 맑았다. 머릿속에서 마구 튀기던 공은 이미 바람이 빠져 한쪽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나는 옛 도인들이 원했을 참된 ‘무’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교문 쪽을 바라봤다. 멀리서 여고형이 보였다. 형은 밝은 얼굴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기. 하나 드세요.”

 

“나도 사오려고 했는데. 얼굴이 정말 안 좋네. 이제 곧 끝날 거야.”

 

“여기 별로 안 변했네요?”“그러게. 벤치 페인트칠은 다시 했군.”

 

“그래도 예전처럼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네요.”

 

“원래, 그런 거야. 과거에 있어야 낭만인 거지. 그런 의미에서, 스무고개 한번 해볼까?”

 

여고형은 장난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난 피식 웃었다.

 

“뭐, 좋아요.”

 

“그럼, 물어봐.”

 

“아, 형이 출제자군요. 그럼. 하나, 생물인가요? 무생물인가요?”

 

“무생물이야.”

 

나는 다시 한 번 씩 웃었다. 내가 ‘스무고개’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그 문제를 내려는 걸까?

 

“둘, 무슨 모양인데요? 사각형? 원형? 세모?”

 

“사각형.”

 

“셋, 사람보다 작아요? 커요?”

 

“사람보다 작아.”

 

“넷, 파는 거죠?”

 

“응.”

 

“다섯, 비싸요?”

 

“비싼 것도 있고, 싼 것도 있고.”

 

“여섯, 어디서 팔아요?”

 

“서점이야.”

 

“엥? 서점?”

 

“응 정답은 책이다.”

 

“에이, ‘밴드’ 문제가 아니었네요?”

 

“아냐. 정답은 책이라고. 로매가 훔치려고 했던 건 책이었어.”

 


그 순간. 나는 멈췄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책이라고?’

 

“삼촌 책?”

 

“그래. 그리고 성공한 것 같아. 어제 네 집 서재를 보니까 서너 권 정도 빼간 것 같더라고.”

 

“어떻게……?”

 

“현재 나로서는 로매를 데려올 방법이 없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카페에 글을 남겨놓았어.”

 

“카페라뇨?”

 

“실제로 개설돼 있더라고. 비공개로. ‘아리아드네의 실.’”

 

“네?”

 

“아마 네가 의심이 워낙 많아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아무튼 어제 집에 가자마자 개설자에게 쪽지를 보내놓았어. 그냥 없던 일로 해줄 테니까. 여기로 오라고. 2시 반까지.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야. 10분 더 기다려보고 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설명해줄게.”

여고형은 손가락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만약 온다면, 잘된 거니까. 싸우지는 마라.”

 


피가 몰린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순식간에 초연한 ‘무’의 상태에서 속된 ‘유’의 상태로 돌아갔다. 뺀질뺀질한 로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먹 쥔 손이 나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멀리서 로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점점 커졌다. 5미터, 4미터, 3미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비닐봉지에서 사이다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로매의 몸을 겨냥해 던졌다. 여고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묵직한 사이다 캔은 로매의 배에 적중했다. 로매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주저앉았다.

 

“마셔, 인마!”

 

“미…… 미안하다.”

 

여고형이 재빨리 다가가 우리 사이에 껴들었다.

 

“자자, 이러지는 말자고.”

 

형은 호들갑스럽게 손발을 놀리더니 벤치 하나에 한 명씩 우리를 떼어 앉혔다. 그러고 그 앞에 서더니 손가락을 들어 로매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후회 중이었다. ‘사타구니에 던질걸.’

 

“로매! 일단 총무에게 책 돌려줘!”

 

로매가 백팩을 열더니 주섬주섬 책을 꺼내더니 뽁뽁이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책 세 권을 나에게 건넸다.

 

“미안하다.”

 

나는 로매의 눈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책이람?

 

“어디 한번 볼까?”

 

“그러세요.”

 

여고형이 조심스럽게 책 포장을 벗겼다.

 

“허허, <그레이엄스 레이디스 앤 젠틀맨스 매거진>. 설마 <모르그 가의 살인>이 실려 있는 건가?”

 

로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하! <스트랜드 매거진>. 여기 ‘셜록 홈스’가 처음 실린 건가?”

 

그나마 익숙한 ‘셜록 홈스’라는 단어가 귓가에 들려오자 나는 움찔했다. 그런 게 있었어? 집에?

 

“이건 뭐지? <미스터리 리그>?”

 

“그건 엘러리 퀸이 <EQMM> 이전에 발행했던 잡지에요. 초호, 초판이에요.”

 

로매형이 책을 조심스럽게 포장하고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총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삼촌 이재선 씨는 상당히 유명한 고서 수집가야. 물론 분야가 좀 한정돼 있긴 하지만.”

 

그러고 로매를 다시 가리켰다.

 

“로매. 네가 설명할래? 아님 내가 할까?”

 

로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형이 하세요.”

 

“알았어. 틀린 거 있으면 말해.”

 

오로지 여고형만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로매는 고개를 숙인 채 아직도 배 부근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나는 책이고 뭐고 화딱지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여고형은 찬란한 여름 햇살을 뒤로하며 손가락을 높이 쳐들었다.

 

“여기 로매는 사실 도둑이야. 이 일의 전체 그림은 집에 처박혀 있는 총무를 밖으로 내보내고 진귀한 잡지를 훔쳐내는 일이었지.”

로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도둑은 아니에요. 그냥 의뢰받은 거예요.”

 

“그럼, 의뢰받은 도둑이구먼. 조용히 해.”

 

“아니라니까요, 처음에는 거래하려고 했었어요. 재선 씨랑 접촉해서 찾아가서 설득해보려고 전화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해외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동안 귀국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현재 집은 조카가 봐준다며 와봤자 헛수고라고 했어요.”

 

나도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삼촌이랑?”

 

“그래. 아무튼 우리 의뢰인은 막무가내였고 게다가 우리 실력을 빌미로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어.”

 

여고형이 로매에게 물었다.

 

“뭔가 절박한 게 있었군?”

 

“네. 이달 말까지 그 책들을 안 가져오면 우리 사무소는 평판도 투자도 끝날 판이었죠.”

 

“사정이 어쨌든 도둑은 도둑이야. 뭐, 로매는 의뢰받은 절박한 도둑이었어. 그런데 그 와중에 삼촌의 조카가 총무라는 걸 알게 된 거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훔치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었지. 여기까지 맞지?”

 

“맞아요. 여준이인 걸 알고 정말 놀랐죠.”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잠깐. 내가 거기 사는지 어떻게 알았던 거야?”

 

로매가 나를 바라봤다.

 

“통장 아줌마. 조카가 누구인지 이름을 확인해놓으려고 했었거든.”

 

“뭐라고? 통장을 회유한 거야?”

 

“아니, 통장이 아니야. 그냥 알바 아줌마였어.”

 

나는 사이다를 입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이 자식이. 여고 형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로매는 타깃이 너란 걸 알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 카페를 개설했어. 그리고 협력자 한 명을 구했어. 그게 바로 민영이였지. 어떻게 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경악했다.

 

“김민영이 널 도왔다고? 어디 있어? 지금?”

 

로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 지금 오는 중이야. 사과하려고.”

 

여고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로매는 민영이 쓰지 않는 2G 휴대폰을 빌려서 개통했어. 그래서 휴대폰이 하얀색이었고 리락쿠마 액세서리가 매달려 있었던 거야. 내가 가장 먼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그거였어. 패션에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놈이 그런 걸 가지고 다닐 리는 없거든. 아무튼 로매는 원래 전화에 있던 스팸 메시지 몇 개를 남기고 자기 폰으로 험악한 남자의 어투로 몇 개의 문자를 보내놓았지. 그래서 덫은 완성. 그런데 스팸 메시지 날짜까지는 조작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휴대폰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파일 상태에서 날짜를 변경한 후에 출력을 했지. 물론 우리 사람 좋은 총무에게는 경찰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어쩌고저쩌고 변명을 했지. 총무는 아아 그렇군. 고개를 끄덕끄덕 넘어갔고.”

 

아악!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여고형은 왠지 웃음을 참으려는 듯 하늘을 쳐다봤다.

 

“너무 억울해하지 않아도 돼. 원래 의심 많은 사람은 진실 100이나 거짓 100에는 잘 안 속는 법이지. 거짓과 진실을 적절하게 배합해야 속일 수 있는 거야. 이 경우에는 진실 70에 거짓이 30 정도 섞였으니 누구라도 속아 넘어갔을 거야. 이 계획은 딱 여기까지였어. 그러니까…….”

 

나는 여고형의 말을 자르듯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신혜은은 누구야?”

 

로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민영이 룸메이트야. 좀 나이 많은 대학원생인데 방학이라서 집에 내려갔어.”

 

“뭐야, 그럼 그 집은 김민영, 신혜은이 사는 집이었어?”

 

“그렇지. 뭐.”

 

여고형은 매우 즐거워보였다.

 

“기가 막힌 거지. 로매가 수완이 제법이야. 스팸 메시지를 통해 사는 장소를 좁혀서 추적하고 뭐 그런 건 다 쇼였던 거야. 로매는 그냥 민영이가 사는 빌라로 향하는 길을 그럴 듯한 모험으로 장식했던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아마 계획은 딱 여기까지였을 거야. 총무가 다음 날 약속 장소인 의정부로 나가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릴 테니, 로매는 나가지 않고 룰루 휘파람을 불면서 집을 털면 되는 거지. 그리고 연락 끊고 전화 번호 바꾼 후에 잠수. 그러면 총무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은 없겠지. 아마 지금까지 책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걸?”

 

로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가 로매형하고 민영이 전화번호까지 알려달라고 해서 상황이 조금 바뀐 거야.”

 

여고형이 바로 말을 받았다.

 

“그렇지! 민영이 전화번호는 어떻게 할 수 없었지. 로매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면, 아마 총무는 민영이에게 전화를 걸든지 하겠지. 민영이 번호는 진짜였으니까. 그래서 로매는 민영이에게 허겁지겁 연락한 후에 2차 쇼를 준비한 거지. 하하하.”
나는 여고형을 노려봤다.

 

“형은 뭐가 그렇게 신나요?”

 

“미, 미안하다. 아무튼 총무와 로매는 의정부에서 함께 만났지. 뭐 로매는 이미 눈을 감고도 빌라에 갈 수 있었겠지만, 성심성의껏 연기를 했어. 부동산에 가서 괜히 한번 물어보고 빌라도 좀 몇 개 골라보고 등등. 둘이 열심히 탐정 놀이를 하는 동안 미리 연락을 받은 민영이는 신혜은 이름의 카드 명세서를 보란 듯이 우편함에 넣어 놓고는 자기 집에서 시체 분장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 그런데 로매 그건 어떻게 한 거야? 그 누에고치?”

 

“아 그거, 별로 시간이 없어서 모기장으로 돌돌 말았어요.”

 

“모, 모기장?”

 

나는 사이다 캔을 다시 움켜쥐었다. 여고형이 다시 물었다.

 

“그럼 시트의 핏자국은?”

 

“아 마땅한 게 없어서 쌈장을……. 케첩 같은 건 너무 선홍색이라 티가 나거든요.”

 

나는 사이다 캔을 번쩍 치켜들었다. 여고형이 내 팔을 잡았다. 로매는 움찔하면서도 얄밉게 한마디 덧붙였다.

 

“가까이 갔으면 아마 쌈장 냄새가 났을 거야. 그럴까 봐 내가 일단 넘어졌지.”

 

“이런 쌈장 같은 년놈들!”

 

나는 간신히 화를 억누를 수 있었다. 여고형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사실, 총무도 좀 미련한 게 그 301호의 눈동자는 좀 의심을 해봤어야 해. 왜 문을 그냥 닫았겠어? 소란스러워서 문을 열었는데, 보니까 이웃집에 자주 놀러오는 사람이라 닫은 거야. 그 간단한 사실에 공포를 끼얹으니까, 이상한 추리가 된 거지.”

 

“그래요! 난 어리석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쌈장에 속았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여고 형이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지. 로매는 거기서 휴대폰을 놓고 왔다고 또 쇼를 해. 우리 착한 총무는 차마 함께 가지 못하고 눈물로 친구를 보내지. 로매는 그길로 달려가서 모기장에 둘둘 말린 민영이를 풀어주고 쌈장이 잔뜩 묻은 시트를 빼서 세탁기에 집어넣어. 시트는 두 겹으로 깔려 있었거든. 그리고 민영이는 어디 영화 보러 놀러가고 로매는 바로 택시를 타고 총무 집으로 가서 책을 훔친 거지. 넋이 나간 총무는 로매를 기다리다가 철수한 거고. 얘기를 들어보니 괴로워서 집을 청소했더구먼. 스스로 열심히 증거도 인멸한 거지.”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곤 한다. 나 역시 이미 그런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술술 속아 넘어가다니,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뭐라도 저항해보고 싶었다.  

 

“잠깐만요. 거기까지는 제가 바보라고 쳐요. 그런데 로매가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경비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비밀번호 도어락을 무슨 수로 열었다는 거죠?”

 

여고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야.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 ‘좋은 생각’이지.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그제 밤 12시쯤에는 택배가 온 적이 없대. 그걸로 무슨 재주를 부려서 들어온 것 같은데.”

 

“네? 뭐라고요?”

 

맞다. 당시에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시간도 그랬고 송장이 없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뜬금없이 보험회사라니.

 

“로매 넌 도어락을 어떻게 해제한 거지? 너 혹시 해정기라도 가지고 있니?”

 

로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 해정기를 어떻게 알아요?”

 

“고압으로 전기 회로에 충격을 줘서 락을 해제하는 장치. 최근에 교정본 <월간 열쇠>에 상세히 나오던데.”

 

“해정기는 이제 거의 쓸모없어요. 요즘 도어락은 거의 다 기판을 재설계했거든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실 그게 좀 까다로웠는데……. 이제부터 제가 설명해도 돼요? 형?”

 

“그럼. 나는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야.”

 

“음. 지하철역에서 총무랑 헤어진 다음에 전철을 타는 척하고 몰래 따라갔어요. 그리고 건물 밖에서 불이 켜지는 걸 보고 층수랑 호수를 재확인했죠. 그다음 주변에 있는 24시간 분식집에 갔어요.”

 

“배가 고팠어?”

 

“아니요. 하하하. 거기서 순대 하나를 사고 배달하는 애 복장을 확인했죠. 모자만 있으면 되겠더라고요. 준비해온 모자를 눌러쓰고 순대를 들고, 배달 왔다고 하고 경비실을 일단 통과했죠. 그리고 그대로 4층에 올라가서 402호에 이걸 설치했어요.”

 

“응?”

 

나도 여고형도 무심코 몸을 들이밀었다. 로매는 가방에서 아주 작은 똑딱이를 꺼냈다.

 

“디지털 카메라에요. 넥 스트랩을 이용해 402호 문에 고정시켰죠.”


나와 여고형은 아직도 무슨 얘기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음, 총무가 사는 건물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집이 마주보는 형태에요. 402호는 복도를 마주보고 407호 왼쪽에 있어요. 총무는 오른손잡이니까 번호 키를 오른손으로 누르겠죠. 즉, 402호에 설치된 카메라로 407호 도어락 왼쪽을 찍을 수 있는 거죠. 설치한 후에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세팅해놓고 셔터를 눌러놓았죠.”

 

여고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밤에 광량이 확보가 돼?”

 

“센서등이 10초나 켜 있기 때문에 가능성은 있었어요. 물론 1차적인 시도였죠. 녹화가 잘 안 되면 다음 날 도어 락을 파손시켜 열려고 했어요.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드릴이 있으면 열 수 있거든요.”

 

여고형이 박수를 쳤다.

 

“너, 그때 카메라를 설치하고 1층 층계참에서 경비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경비는 보통 12시 즈음에 나가니까.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좋은 생각’을 우편함에 넣고 총무에게 택배가 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긴 거군? 그 방법으로 총무가 문을 열고 나갔다 들어오게 만든 후, 장치된 카메라를 회수. 재생해서 영상을 확인. 이건가? 센스 있네.”

 

“맞아요. 영상을 보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위치로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형도 대단하네요. ‘좋은 생각’의 의도를 눈치채다니.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에요. 층만 알고 호수를 모를 때 써먹기에도 좋죠. 4층 우편함 전체에 잡지를 꽂아놓고, 대상자가 내려와서 가져가게 하면, 그 우편함만 비기 때문에 대상자가 몇 호에 사는지 알 수도 있어요.”

 

“아, 좋구나. 좋아. 참신해.”

 

이것들이 서로 칭찬하고 난리가 났군. 이제 대충 이해했다. 나는 이 꼴을 더는 볼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완. 전. 히. 속. 았. 군. 요!”

 

그리고 로매를 바라봤다.

 

“야, 조장섭! 네 사정은 네 사정이야. 사람의 마음 그것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속이려한 건 정말 치졸한 짓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게 옛 멤버에게 할 만한 짓이냐?”

 

로매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네 말이 맞아. 사실, 책을 훔치고 바로 처분하지 못한 건 바로 그 치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 너에게 이렇게 사과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우리 사무실은 망하겠지만……. 아무튼 이건 거짓이 아니야. 정말 내키지 않겠지만,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멋쩍게 우리 둘을 바라보던 여고형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라,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빠들!”

 

민영이가 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며 달려왔다. 모든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나무 그늘 밑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향해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총무 오빠. 로매가 ‘스무고개’ 다시 만들 건데 장난 좀 치고 싶다고 해서요……. 얘기 듣고 보니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민영이의 팔, 다리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모기장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 뭘 탓하랴. 나는 남은 사이다 캔을 들고는 그 얄미운 얼굴에 들이밀었다.

 

“너도 마셔라.”

 

눈을 질끈 감은 민영이가 살짝 실눈을 뜨더니 씩하고 웃었다. 그 작은 미소가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놓은 듯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로매가 슬슬 눈치를 보더니 여고형에게 물었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형은 저를 왜 의심했어요? 8년 만에 연락을 해서?”

 

“물론, 그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지. 그냥 네가 총무랑 처음 만날 때. 우산이 없는 게 마음에 걸렸어. 너는 일이 있다는 이유로 총무와의 약속을 밤 9시에 정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하는 일이 뭐야? 인테리어라고. 인테리어 업자면 원래 내장 외장 공사하는 사람들하고 약속 잡아서 일하는 거 아냐? 그럼 비는 꽤 중요한 요소잖아. 당연히 고려해야 할 만한 상황이라고. 그날 오후 늦게 비가 온다고 분명히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넌 우산이 없었어. 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이상하더라고. 애초에 너를 수상한 놈으로 설정하고, 총무의 이야기를 들으니 네 속셈이 뻔하더라고.”

 

솔직히 나는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이 형 정말 대단하구나. 로매는 더 놀란 것 같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민영이는 달라진 대학 캠퍼스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로매가 입을 다물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날 우산 지하철에 놓고 내렸는데. 역시 형은 유능하지만 운도 좋단 말이지. 정말 까다로워.”

 

의기양양하게 환호성을 기다리던 여고형이 움찔하더니 곧게 뻗은 손가락을 천천히 굽혔다.

 

“뭐, 그것도 실력이야.”

 

로매가 우리 모두를 둘러봤다.

 

“그건 그렇고. 다들 ‘스무고개’ 다시 하지 않을래요? 이번에는 ‘아리아드네의 실’로 제대로 시작해보죠.”

 

민영이가 움찔대더니 말을 꺼냈다.

 

“다들 한다면 나도 할게요.”

 

여고형은 차갑게 거절했다.

 

“할부 갚아야 해.”

 

나는 좀 비아냥대고 싶었다.

 

“무슨 ‘아리아드네의 실’이니? 이름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으로 바꾸고 너나 혼자 하렴.”

 

<끝>

  • 구름이 2013.07.28 03:10
    잘 읽었습니다.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문장을 구사하시는군요.^^
    컴퓨터 화면으로 읽을 경우, 너무 조잡하거나 내용이 엉성하면 읽기가 싫은데 궁금증이 자극되어 한 번에 끝까지 읽었네요.
    트릭이랄까, 아무튼 로매가 사용한 방법은 상당히 복잡하여 어지간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을 것 같지만, '스무고개'라는 모임에 속해 있던 사람에게는 통할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로매가 휴대폰을 찾으러 돌아갔을 때 '나'가 따라간다고 나섰다면, 그리고 만약 '나'가 연락이 두절된 로매가 걱정되어 경찰에 신고했다면 완전히 파토가 나지 않을까 하는데요.
    워낙 오랜만에 만났고 그 동안 친분이 없어졌으니 경찰에 신고까지는 하지 않으려나...
    아무튼 퍼뜩 떠오른 이 두 가지 의문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매끄럽게 잘 읽혔습니다.
    이런저런 부분에서 아름다운 논리가 보이기도 하여 본격 미스터리 빠돌이인 저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decca 2013.07.28 09:22
    흐 감사합니다; 원래 80매짜리를 막 튀긴 거라서; 좀 많이 부족합니다. 퇴고를 거의 안했기 때문에 문장은 포기하고; 일단 복선을 회수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 하이아 2013.07.28 12:25
    모처럼 동시대 독자와 눈높이를 맞춘 미스터리물이라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최근 한국의 추리소설은 우리 현대사회와 전혀 동떨어져 있어서, 등장인물만 한국식 이름으로 바꾼 일본이나 미국 추리소설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는데요... 이 작품은 컴퓨터 동호회나 휴대전화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등장인물도 우리 주변사람같아서 더욱 몰입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통속문학이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데, 앞으로 이 작품처럼 좀더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 decca 2013.07.28 14:37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연재하시는 새 글도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 키안 2013.07.29 12:36
    와 드디어 완결을 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_< 주로 뒤쪽 메인 트릭에 집중하실 줄 알았는데 앞부분 스무고개 동호회 이야기도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쌈장에서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ㅋㅋ
    스팸문자에서 시작된 발상이 원고지 300매 작품이 되다니 정말 신기하고 멋집니다. 창작은 굉장한 일이에요ㅠㅠ
  • decca 2013.07.29 12:44
    키안님께 심심한 감사를 T.T
  • 헤론 2013.07.29 20:42
    잘 읽었습니다. 역시 데카님다운 내공이 느껴지는군요. 이 작품 어디 단편집에 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 decca 2013.07.29 20:51
    아 그런 계획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요; 혹시 기회가 되면 수정을 해서 내야겠죠;
  • 송현제 2013.07.30 21:22
    재미있네요. 역시 데카님다우십니다... 여고형인가요? 이 여고형이란 사람 안락의자 탐정이네요...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되어도 재미있겠습니다.. 역시 많은 책을 읽으시니 좋은 글도 쓰시는군요..
  • 황당당근 2013.07.30 23:16
    우선 완결 축하드립니다. 깔끔한 마무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위에 송현제님 말대로 여고형이 나오는 다른 이야기가 또 있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decca 2013.07.30 23:48
    감사합니다. 부족한 작품에 칭찬을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일단 내년 하우미 15주년을 기념한 소소한 자축이고, 실제로 한번 써봐야 작가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감행;한 일입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 Dimetrodon 2013.10.16 23:57
    데카님과 대화하거나 데카님이 쓰신 글을 보다보면 고전 추리문학을 좋아하시면서도 현대식 소재나 트릭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것이 놀랍습니다. 퇴고를 하지 않은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네요. '여고'의 유머러스함과 캐릭터성도 인상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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