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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6 11:51

바닥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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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로에 면한 지하 만화방에 들러 책을 돌려주고 나왔을 땐 주위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띄엄띄엄 늘어선 가로등에선 희미한 빛이 어슴푸레 스며 나오고 있었고 인근 가게들 간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과 어울려 특유의 밤거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도로 반대편으로 건너가 타야했지만 알싸한 밤 분위기에 홀린 나는 그냥 인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거리이긴 했어도 한낮 무더위 속에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삼겹살집에서 새어나오는 달싹한 고기 냄새와 레코드가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김완선의 노래, 그리고 전파상 쇼윈도에 진열된 TV를 통해 보이는 드라마 속 여배우의 열연에 나는 한껏 들떴고, 건물사이로 난 좁은 골목 안 여관을 향해 두 손을 꼭 잡은 채 걸어 들어가는 커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처럼 보였다. 나는 밤이 선사하는 여유로움에 완전히 취했고, 이 길이 그냥 이대로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낭만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황홀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어느 덧 그녀가 운영하는 양품점에 도착해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가게는 고만고만한 보세 옷가게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주로 30~40대 여성들을 위한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옷들을 다루고 있는 덕에 주위가게들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문을 열자 안쪽 카운터 뒤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던 가게 주인이 보였다. '갸름한 턱'. '각진 코'의 엄마이자 새 엄마의 여동생. 둘은 자매이긴 했어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같이 있을 땐 그 외모의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는데 동생이 언니보다 몸매며 얼굴이 훨씬 예뻤다. 특히 계란형 얼굴과 늘씬한 턱 사이를 있고 있는 날렵한 턱은 그 우월의 차이를 압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배다른 자매. '갸름한 턱'을 처음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을 사실로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각진 코'가 마치 자신의 학년 석차를 얘기 하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중요해?'

 

긴 이야기 끝에 녀석이 짧게 덧붙인 말이었다. 자신의 가정사를 여자 탤런트의 미모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 하찮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갸름한 턱이 단정한 자세로 일어서서는 기계적인 미소로 나를 맞았다. 각진 코가 늘 '가식으로 도배된' 이라고 얘기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 왔니?"

 

그녀는 흰색 원피스 차림이었고 허리엔 뱀처럼 생긴 가는 벨트가 조이듯이 둘러져 있었다.

 

", 가져갈 것이 있다 해서요."

 

", 그래 잠깐만 기다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카운터 뒤의 연결된 방으로 사라진 그녀가 얼마 뒤 한 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아침에 시간 나서 부친 건데 언니 갖다 줘. 비닐 팩에 싸서 넣어 놨으니 대충 데워 먹으면 될 거야."

 

그녀가 해물파전이 든 종이가방을 내게 건넸고 나는 전달받은 가방을 손에 들고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아직 다른 용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시답잖은 배달 심부름이나 하자고 꿀 같은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었다.

 

"여기 이거..."

 

그녀가 풀로 봉해진 편지 봉투를 카운터 서랍에서 꺼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침한 표정과 함께 내게 내밀었다.

 

"아저씨한테 갖다 줘."

 

여기서 아저씨란 우리 클럽에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로 무대에 서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는 그를 항상 '동남아'라고 불렀는데, 늘 초췌한 표정에다 지저분한 구레나룻은 언제나 좌우길이가 맞지 않았으며 무대에 서지 않을 때의 후줄그레한 차림까지 더하면 도저히 아마추어 가수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갸름한 턱과 그 사이에서 이런 연락책을 맡기 시작한 것이 약 세달 전인데, 도대체 그의 어떤 면에 갸름한 턱이 끌리게 되었는 지는 그의 덥수룩한 곱슬머리가 자연산인지 아니면 고급 미용실 파마 덕인지 만큼이나 내겐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이건 수고비"

 

그녀가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주었다. 내가 일요일 오후의 단잠을 포기하고 버스 두정거장을 걸어 여기까지 온 진짜 이유였다. 편지 한통을 전달하고 받는 심부름 값치고는 꽤 큰돈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전 이혼한 남편으로 부터 받은 상당한 액수의 위자료에 지금도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생활비를 받는 그녀에게 이까짓 푼돈이 아쉬울 리가 없었다.

 

"따로 전해드릴 얘기는요?"

 

그냥 가기 머쓱해 인사대신 던진 질문이었다.

 

"없어."

 

용무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돌아서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갸름한 턱이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 아빠한테도 안부 전해줘"

 

나는 '그럼 수고비를 좀 더 주셔야죠.'라고 하려다 말았다.

 

 

손에든 종이가방이 거추장스러워 올 때는 그냥 버스를 타고 왔고, 클럽에 들러 갸름한 턱이 부탁한 일을 마치고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준 파전을 안주삼아 가게서 들고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이내 잠이 쏟아졌다.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아침에 깼을 때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어제 먹은 해물파전때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학교를 안 간 적은 많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본 적은 없어서 일단 등교는 하기로 했다. 하지만 1교시를 지나자 머리까지 깨질듯이 아파왔고 결국 교무실을 찾아갔다. 사정을 얘기하고 조퇴를 신청하자 담임이 한심한 녀석이라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꺼지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울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바닥이 아닌 창밖 먼 곳을 보려고 노력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지나가는 전봇대 개수를 세고 사람들의 옷차림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길가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 다왔다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두통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갸름한 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손이 누군가의 허리에 둘러져 있었고 상대는 동남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내고 싶어졌다. 갸름한 턱은 어젯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던 그 커플이 손을 잡고 들어가던 여관 골목을, '쓰레기'와 함께 부둥켜 안은 채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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