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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6 00:59

[11월 넷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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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맹렬히 고민하고있다.

통장의 잔고는 1만5천원. 하지만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모두 모으기로 마음먹은 이상, 추리소설코너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그냥 넘어갈 순 없다.


고맙게도 '검은숲'출판사에서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모두 번역해 준 덕분에, 매일같이 식사비에서 천 원, 이천 원씩 아껴서 국명 시리즈를 하나 씩 사고있다. 


서점안에 들어온지 30분째.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놓칠수는 없지만, 이 책을 사면 통장잔고가 2천원밖에 남지않아 앞으로 5일을 굶어야한다. 


옆 책장의 동서 미스테리 북스 코너에 아담히 꽂혀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에게 눈길을 돌렸다. 조금 번역이 후지긴해도, 똑같은 엘러리 퀸의 Egyptian Cross Mystery를 번역한 책이다. 가격은 6000원으로, 훨씬 싸다.


Egyptian Cross Mystery를 읽고 싶은데, 동서 미스테리 북스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읽을 것인가, 검은 숲 출판사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읽을것인가.


후진 번역판을 읽고 굶주리지 않을것인가, 세련되고 개정된ㅡ바르게 번역된ㅡ 책을 읽고 5일을 굶주릴 것인가.


고민끝에 답을 내렸다.

굶자.


이미 집 책장에는 검은 숲 출판사의 <로마 모자 미스터리>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샴 쌍둥이 미스터리> <미국 총 미스터리> <스페인 곶 미스터리>가 꽂혀있다. 


남은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뿐인데, 이제와서 뜬금없이 이집트만 동서 미스테리 북스 버전으로 살수는 없다. 그러면 멋이 없다. 



2000원으로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5일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게 내 마음이야!"

뭐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교보문고 서점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여자가 있다니.


목소리는 조금 허스키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저녁 8시는 늦은 시간이긴 하다만, 서점안에서 저렇게 큰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다니 말세다.


고개를 돌려봤더니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양손으로 책을 한권 끌어안고 있었다.

교복으로 보건데 근처의 여상 학생이다. 얼굴은 풀 메이크업 상태였지만, 귀걸이나 다른 장신구는 일체 없고, 머리도 꾸밈없는 그냥 긴 머리이다. 표정만은 장난기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양손으로 끌어안고있던 책은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였다.

...납치당하고 싶은거냐.



"뭔 소리하는거야.. 책이나 고르자"


주황빛으로 염색하고, 펌을 한 , 귀에는 귀거리가 걸려있었으며 츄리닝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있던, 누가봐도 일진입니다,하는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의외로 목소리가 순둥해서 놀랐다.


"책같은걸 왜 읽어 시간나면 TV보면되지!"

여자애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남자애쪽에서 순둥한 목소리의 대답이 나왔다.

"반에서 보려구.. 책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져."


...일진의 몸에, 모범생의 정신이 들어간 꼴이 바로 이 꼴이리라.

아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좋은 교훈이겠지.. 암, 오늘의 반성!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계산하고 나왔을 때, 가게 앞에는 태건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녀석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일찍 나와서 서점구경이나 할까ㅡ하고 서점에 들렀다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와 만나서 고민에 빠져버렸던 것 이다.


10분이나 늦어버렸다. 그냥 고민하지말고 살 걸...


"뭐 산다고 이렇게 늦었냐? 시계 좀 보고살어."

태건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물론 내 잘못이니까 사과하고, 내가 왜 늦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같은 내용의 책이있는데, 옛날 버전의 책이 있고 신판 버전의 책이 있어서 둘 중 뭘 살지 고민했다?"

태건이가 내 말을 바르게 이해했는지 내게 물었다.


"그냥 옛 버전, 신판 버전의 차이가 아니야. 번역의 질이 달라. 각 챕터마다 새로운 주석도 달려있다고. 사어死語도 개선됬어"


태건이는 이 중대한 차이를 납득하지 못하는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차피 내용은 같잖아. 그럼 더 싼걸 읽으면 되지."



나는 집에 검은숲 출판사 버전의 국명 시리즈가 여러 권 있고, 이집트 십자가만 뜬금없이 동서 버전으로사면 상당히 멋이 떨어지며, 검은숲 출판사 버전의 깔끔한 번역에 익숙해진 내가 동서 버전의 낡은 번역을 읽었다간 읽다가 지칠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보니 엘러리 퀸이라는거 어디서 들어봤는데"

태건이가 말했다. '거'라니, 사람이름입니다만.


"크로즈드? 크로스? 비슷한 거였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하다는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집션 크로스 미스터리?(Egyptian Cross Mystery)"

내가 손에 들고있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를 흔들어보이며 물었다. 엘러리 퀸과 관련된 크로스는 이것밖에 없다.


태건이가 말했다.


"아니, 크로스가 아닐수도 있어. 크로ㅡ까지는 기억나는데.."


혹시, 어쩌면 엘러리 퀸의 클로즈드 서클인 <샴 쌍둥이 미스터리>를 말하려는 건가. 엘러리 퀸 작품 중 몇 안되는 클로즈드 서클이니까. 하지만 그러기엔 태건이의 미스터리 지식이 너무 얕다. <샴 쌍둥이 미스터리>라는 책을 알고있더라도, 클로즈드 서클이니 뭐니하는 지식은 태건이에게 없을것이다.


"혹시 <샴 쌍둥이 미스터리>?"


"아냐."


혹시나해서 물어봤더니 단번에 부정당했다.















"흑백영화야"



순간, 뒷통수를 소화기로 강하게 맞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라고?


"...영화? 엘러리 퀸의 영상화 작품을 네가 봤다고?"

사실 나는 NBC에서 드라마화된 엘러리 퀸도 다 보질 못했다. 그만큼, 엘러리 퀸의 영상화작품들은 희귀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내가 본게 아니라,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가 이야기 해줬는데, 엄청 낡고 오래된 Detective 영화라고..엘러리 퀸이 어쩌구저쩌구하던데.. 뭐였더라, 기억이 안나네"


어째서 형사ㅡDetectiveㅡ만 혀를 굴려가며 영어로 말하는거냐.


아무튼 전혀 모르는 작품은 아니다. 엘러리 퀸의 팬인 내가 모를 수는 없지.


"...아마도, <A Close Call for Ellery Queen>이라는 작품일거야"


"그래 그거!!"


태건이가 속이 시원하다는듯이 말했다.


"1942년에 개봉된 작품이야. 추리소설가 엘러리 퀸은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작성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때 <용의 이빨>Dragon's teeth라는 작품을 쓴 적이 있어. 엘러리 퀸은 평소 움직임이 적은 대신에 대사가 많은 소설을 썼는데, 그런 작품은 영상화했을때 재미가 없거든. 그래서 <용의 이빨>에서는 주인공을 두 명으로 설정해서, 육체파 탐정인 보 럼멜과 두뇌파 탐정인 엘러리 퀸이 2인 1조로 사건을 해결해.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맹장염으로 쓰러진 엘러리를 대신해서 럼멜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온갖 위기를 넘기며 모험을해 단서를 모아서, 마지막에 엘러리가 럼멜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들로부터 논리적인 추론을 이끌어내 범인을 지목하지. 범인을 지목하는 가장 큰 단서는 범인의 이빨자국.....아니,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아무튼 <A Close Call for Ellery Queen>은 이 <용의 이빨>을영화화한 작품이야."


태건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넌 어떻게 이런걸 다 아냐?"



"무슨소리야, 팬이라면 당연한거지."

나는 뿌듯하게 말하고, 이어서 말했다.



"<용의 이빨>은 재미있는 작품이야. 엘러리가 범인을 지목하는 기술이랄까, 범인에게 '당신이 범인이야!'라고 말할때의 자세를 설명하기도 하거든. '범인을 지목할때는 자신이 제우스 신이라는 생각으로 지목해야한다. 지진이 일어나도 자신은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논리로, 자신감을 가지고 지목해야한다'고 하거든. 그리고 슬쩍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를 언급하기도 해. "


"그래서 그 용의 이빨인지 공룡의 이빨인지 하는 책은 사건 해결하고 끝나는 소설이야?"

태건이가 물었다.


"아니, <그리스 관 미스터리>와 <샴 쌍둥이 미스터리>, <열흘간의 불가사의>, <꼬리 아홉 고양이>와 같이 엘러리의 추리는 빗나가. 사실, 용의자 중 한명이 옛날부터 다른 사람에게 서명대필을 시켜왔었기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서명은 다른 사람이 한 것이었는데 엘러리는 과연 거기까진 도달하지 못해 용의자가 다른사람인 척 했다고 추리를..."


"...근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왜 했지"


태건이가 그제서야 내 말을 저지했다.

내가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꽤 변경된 내용이 있긴 하지만, <A Close Call for Ellery Queen>은 <용의 이빨>을 원작으로하는 영화라는거지 뭐. 구글에서 검색하면 주문해서 볼 수 도 있지만, 1942년도의 흑백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니 신기하긴하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태건이는 내 말을 듣는것 같지 않았다.


태건이가 서점 출구쪽을 처다보며 말했다.


"신기한건 저 사람들이 신기하지.."


태건이가 바라보고있는 쪽을 봤더니, 아까전의 그 커플 ㅡ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를 들고있던 여자와 그녀의 남친ㅡ이 지나가고있었다.


뭐가 신기한거지?


"뭐가 신기한데?"


"저런 사람들도 연애를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할까.."



...과연, 그런 관점인가. 하지만 저 사람들이 신기한게 아니고 '너'가 신기한건데. 연애하는게 뭐가 신기한거냐. 나는 여자친구가 있단말이다.





"고딩들이겠지? 수능끝나고 사귀는걸까.."

태건이가 힘없이 말했다.




나는 태건이를 위로(?)하며, 가볍게 설명했다.




"그건 아니지. 아니, 사귀는게 아니라는게 아니라, 수능끝나고 사귀는게 아니라고..근거없이 말하는게 아니라, 여자가 교복을 입었다는 점과 화장을 했다는점을 토대로 이끌어낸 이야기야. 여자가 입고있는 교복은 상고 교복이야. 저 여자는 고등학생이라는 말이지. 수능 친 고3은 수업이 오전에 끝나기 때문에,여자라면 얼마든지 더 예쁘게 꾸밀 수 있을거야. 교복말고 더 예쁜 옷을 입고 남친과 시내에 나올수도 있고, 머리도 예쁘게 꾸밀 수 있지.그런데 저 여자는 어째서 교복차림에 수수한 헤어스타일일까? 그냥 꾸미는걸 싫어하는 아이일까?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얼굴이 풀 메이크업 상태니까. 저 여자도 한창 꾸미고싶어한다는 이야기지. 그렇다면, 예쁘게 꾸미고 싶은데도 교복을 입고 머리를 꾸미지 못하고 다니는건 오직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어. 저 여자는 수능을 친 고3이 아니라는 뜻이야. 저 여자는 고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이야"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난뒤, 이어서 계속 말했다.


"여자가 고등학교 1,2학년이라면, 남자는 나이가 어떻게 될까? 남자는 교복이 아니라 사복차림이었고, 염색한 머리에 펌도했어. 그렇다는건 최소한 고3이상은 된다는 뜻이지.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게, 여자는 분명히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어. 따라서 남자가 고3 이상이라는건 타당해. 여기서 조금 더 파고들어가볼까? 아까 서점에서 저 남자와 여자가 대화할때, 분명히 남자는 '반에서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학에서는 반같은건 없거든! 각자 본인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들을 뿐이지, 고등학교때처럼 '반'은 없잖아. 그런데도 저 사람은 '반에서 책을 읽는다'고 말했지. 따라서, 남자는 고3이야."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남자가 고3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줄만한 근거가 있을까? 물론 있지. 이건 남성의 심리와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단다. 많은 학생들이 수능을 치고 대학에 가면, 온갖 노력으로 자신의 외모를 갈고닦아. 여자애들은 화장기술이 늘어나고ㅡ내 여자친구는 화장안해도 예쁘지만ㅡ 남자애들은 운동으로 근육을 다지지. 어딜 어떻게봐도 여러모로 고등학생보다는 화려해져. 그런 환경속에서 11월까지 대학생활을 했다면,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에 이끌리기 마련이야.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있지. 하지만 저 남자는 명백한 고등학생과 사귀고 있으니, 남성심리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저 남자는 고3이고, 아까 말한 결론을 뒷받침해주지."




"남성심리라니.. 그건 좀 근거가 희박한데"

태건이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내 말이 맞을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추론이 줄줄 잘 나온다. 머리가 잘돌아가는 기분이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치는 기분이고, 지구가 나를위해서 회전하는 느낌이다. 수수께끼가 풀릴땐 이렇게나 상쾌하다.



"..니 말이 맞는거 같다, 넌 진짜 이상한데서 머리가 좋다니까.. 동생 담배사건도 그렇고.."

태건이가 마지못해서 나를 칭찬했고, 나는 기분이 썩 좋은 상태가 되었다.


"야, 일단 뭐 좀 먹으러 가자"


내가 태건이에게 기분좋게 제안했다.

바로 근처 맥도날드로 향해 갈 때, 우리는 아까 그 커플 근처를 지나갔고, 그때 여자와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 눈은 감으면 되지만, 귀는 감을수가 없으므로 자연스레 대화가 귓속에 들어왔다.








"오빠가 입으래서 입긴했는데, 3년만에 교복입으니까 다시 고딩된거 같아! 나 잘어울려?"









...


순간, 머리가 어질했다.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까 그 추론은 죄다 틀린것일까? 3년만에 교복을 입었다는말은, 저 여자는 최소 22살이라는 뜻이된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잘난듯이 줄줄이 추리를 읊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귓볼까지 빨개진게 느껴졌다.


태건이가 나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 1, 2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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